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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종리 새만금영농조합 이남학씨2015-03-16

화산 종리 새만금영농조합 이남학씨

“내 인생 두번째무대는 우주선같은 미곡처리장”

 

화산 종리 새만금영농조합 이남학씨

 

유리공장 25년 일하다
군산 소매쌀값 쥐락펴락하는
장인의 팔마정미소서 일 배워 독립

완주는 이모작하는 농가 많아
9월부터 두 달간 쉴새없이 나락 건조
도정 검사 판매까지 일괄처리

 

작년 한 해 완주에 귀농한 사람 몇몇이 모여 논농사를 지었다. 그 모임에 꼽사리 껴서 모내기도 하고 풀도 뽑았다. 대가를 바라진 않았지만 햅쌀 20kg을 얻었다. 유난히 밥맛이 좋아서 안 먹던 아침을 자주 해먹는다. 찰지고 귀한 쌀밥을 먹을 때마다 이 쌀을 도정했던 미곡처리장의 모습들이 생각난다. 도정기가 시끄럽게 돌아가고 먼지는 풀풀 날리고,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말소리조차 듣기 힘들었다. 그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 아저씨 목소리만은 소음을 뚫고 정확히 들렸다. 우주선 조정석에나 달려 있을 법한 복잡한 단추들을 누르며 알 수 없는 기계를 작동시키는 그 아저씨는 SF영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우주선 조종사 같았다. 24시간 기계가 돌아가던 가을, 겨울철이 지나고 나서야 그곳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인공지능시스템을 조종하는 이남학씨.

 

나락 건조와 도정을 함께 하는 미곡처리장

 

화산 삼거리를 지나 종리에 있는 미곡처리장. 그곳에 들어서면 (구)종리 정미소라는 간판이 가장 눈에 뛴다. 고개를 돌리면 화산미곡처리장이라는 간판도 보이고 이런저런 간판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이곳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주인장 이남학씨(50)에게 물었다.

 

“원래는 종리 정미소였지. 그 다음 인수한 사람이 화산미곡처리장으로 했다가 그 후에 화산미곡산업주식회사 만들었다가 내가 인수해서 다시 화산미곡처리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2013년 9월에 새만금영농조합법인으로 등록을 했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화산미곡처리장으로 부르지만 공식적인 이름은 새만금영농조합법인 미곡처리장이지.”

 

이곳의 역사가 간판으로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방앗간, 정미소, 미곡처리장 차이점이 뭔지 궁금해졌다.
“제일 작은 단위가 정미소, 방앗간이지. 여기서는 곡식을 찧고 빻는 것만 해. 그 다음이 미곡처리장이지. 여기서는 나락 건조부터 찧고 빻고 수매하고 판매까지 하는 거지. 그 다음이 미곡종합처리장RPC야. 여기는 농림부에서 지원을 받는 곳이야. 지정을 받으려면 좀 까다롭지. 이곳에서는 건조, 도정, 저장, 검사, 판매까지 모든 과정을 일괄적으로 처리하는 곳이지.”

 

그냥 스쳐지나갈 때는 몰랐다. 그저 곡식을 빻는 곳인 줄만 알았는데 공간과 기계규모에 따라 하는 일의 범위가 나뉜다.

암호같은 숫자와 용어로 가득한 미곡처리장의 장비들.

 

달짝지근한 밥맛은 쌀눈이 좌우
그걸 반쯤 남기고도
하얀색이 나도록 백미를 깎는 일
그게 제일 중요한 기술이지

정미소는 먼지까지도 다 팔아먹는 곳
쌀겨 왕겨 미강은 물론
먼지까지 거름으로 팔지
버릴게 하나도 없어

 

처갓집에서 어깨너머 배운 도정일

 

이남학씨의 고향은 운주. 중학교 때까지 고향에서 부모님 딸기농사를 돕다가 고향을 떠나 89년부터 군산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유리공장에서 25년 동안 일하고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가정을 꾸렸다. 도정일과는 전혀 관계없는 삶인데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처갓집이 군산에서 정미소를 했지. 6.25 전쟁 전 부터 있었던 정미소야. 팔마 정미소라고 아나? 유명한 곳이야. 군산 소매쌀값을 좌지우지하지. 처남 둘도 가업을 이어서 정미소에서 일하고 있고 나도 장인어른에게 도정 일을 배워서 여기 완주에서 일을 하고 있지. 처음에는 나락 나르는 일부터 배웠어. 나락 집어 넣는 일, 승강기 돌리는 일, 차차 배워 나갔지.”

 

군산의 팔마산 근처 팔마재에는 새벽마다 쌀시장이 크게 열렸다고 한다. 주로 농산물 주거래 시장이었으며 특히 쌀도매업이 성행하여 팔마재 일대는 정미소가 많았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건재하게 자리 잡고 있는 장인어른의 팔마정미소. 이남학씨는 그곳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도정 일에 대한 지식과 자부심이 있었다.

 

“모든 경기가 굴곡이 있어. 잘 되다가도 침체가 되고. 부동산이고 전자사업이고 잘 되었다가 안 되기도 하고 그러지. 그리고 자본주의 세상이니까 돈 잡고 있는 사람들이 다 해먹는 세상이기도 하지. 물류나 제과사업, 그런 것들도 보면 동네에서 하던 것들이 다 대기업화 되고 대규모로 하는 거잖아. 위에서 눌러 버리고... 정미소도 물론 대규모화되고 있지만 그래도 땅이 있으면 누구든지 농사를 지어먹고 살 거 아니야. 세상이 아무리 그래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정미소 방아는 멈추는 법이 없겠지. 방아를 찧어야 밥을 먹고 살 것 아니야. 굶어죽지는 않겠다 싶었지.”

 

 

내 손을 거쳐야 하얀 쌀밥이 나오지

 

식량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대에 보급되었던 밥맛은 덜하지만 수확량이 많았던 통일벼에 대한 이야기는 그 시대를 살아낸 어르신들에게 듣기만 했다. 그저 흰 쌀밥 배부르게 먹어 보는 게 소원이던 시절. 지금은 밥맛 좋게 개량된 쌀들이 넘쳐나고 흰 쌀밥 말고도 먹을게 넘쳐나는 세상이다. 논에서 자라는 벼가 어떻게 우리네 밥상위에 올라오는지 잘 모르는 세상이기도 하다.

 

“논에서 콤바인으로 나락을 베어서 건조장으로 가져오지. 막 베어서 안 말리고 가져 온 것을 물벼라고 하지. 완주는 양파나 마을 농사 때문에 대부분 이모작하는 데가 많거든. 말리는데 보통 15~20시간 정도 걸리지. 일모작한 쌀들은 5~7시간 밖에 안 걸려. 나락 베기 전에 논에서 한 달 정도 말려서 가져오니까. 다른 지역은 건조, 도정하는 작업을 한 달간 하는데 여기는 이모작 때문에 9월부터 베기 시작해서 두 달간 계속 돌아가는 거야.”

 

그렇게 건조한 나락은 도정하는 곳으로 옮겨져 승강기를 타고 색채기, 석발기를 통과해 이물질 또는 잡티, 풀씨 등 불량미가 골라진 후 현미 분리기에서 분리 된 후 몇 차례의 도정을 통해 백미가 된다.

 

“제일 중요한 일은 백미 깎는 일이야. 쌀 고유의 달짝지근한 맛. 그 맛이 쌀눈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너무 하얗게 깎으면 쌀눈이 다 떨어져요. 쌀눈이 반절정도 남을 정도 깎으면서 때깔은 하얗게 깎는 것, 그것이 기술이지. 정미소는 먼지까지 다 팔아먹는 곳이야. 버릴 게 하나도 없어야해. 먼지도 다 쓸모가 있어. 쌀겨, 왕겨. 청치, 미강. 도정하고 남은 부속물들은 사료로 쓰고 밭에 거름으로 쓰이고 여자들 샤워할 때 쓰면 피부가 보들보들해지지.”

 

이남학씨는 올해로 쉰살. 농촌에서는 한창 나이다. 인생 이모작 시대. 한 철은 유리공장에서 유리 만드는 일을 했고 나머지 한 철의 미곡처리장 일이 이제 시작됐다. 20~30년 후에도 여전했으면 좋겠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정미소 기계소음과 먼지를 뚫고 들려오기를, 농부들이 여전히 농사를 짓고 나락을 실어 오기를.

 

/글·사진=장미경

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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