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일하며 얻은 것들202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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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평생을 일하며 얻은 것들
- 소양 평리마을 곽옥희
시간이 가면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때가 되면 땅에서는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하늘에서는 눈과 비가 내리는 스스로 그러한 자연의 이치들이 요즘은 눈물 나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봄 내내 미세먼지가 하늘을 뿌옇게 뒤덮었고 여름엔 장맛비가 쉼 없이 내렸다. 코로나를 피하려고 사람들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낯선 세상을 살아가면서 올 가을에는 나락이 익고 단풍이 빨갛게 물들 수 있을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산에는 단풍이 들었고 들에는 수확이 한창이다. 해마다 마주하는 가을 풍경이지만 올해는 때가 되서 그렇게 찾아와 준 가을이 더없이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11월에 접어든 어느 날, 소양면 산소골 집 앞 텃밭에서 생강을 캐고 있는 곽옥희씨(66세)를 만났다. 그녀는 막 캐낸 생강의 알싸한 향기와 함께 평생을 일하며 귀하게 얻은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딸이 이제 그만 일하라고 말려요. 그런데 일 한하고 집에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아. 안 좋은 생각만 떠올라요. 막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면서 일을 해야 마음이 편해요. 그래서 닥치는 대로 어디 일하러 오라고 하면 사람 모아서 데리고 가서 일하고 해 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거야. 젊었을 때는 돈 버느라 그렇게 일했지만 지금은 돈 보다는 내 마음 편 하려고 일하는 거야. 평생을 쉬어보질 않아서 쉬는 게 어색하지. 내가 번 돈은 정말 떳떳한 거야. 이 작은 몸으로 일해서 한푼 두푼 모아서 통장에 모아놓은 것이 참 뿌듯하더라고. 내 돈으로 손자들 맛있는 거 사줄 때 그때 좋더라고. 용돈도 주고. 그때 참 행복해요.”
평생을 쉬어보지 않아서 쉬는 게 어색하다는 곽옥희 씨, 그녀가 평생을 일하며 귀하게 얻은 것들은 무엇일까
곽옥희씨의 고향은 이곳 소양이다. 오남매 중에 셋째였고 외동딸이었다. 하지만 돈을 벌어야 해서 열아홉에 동네 친구들과 전주역까지 걸어서 서울 가는 기차를 탔다. 미싱공장에서 속옷 미싱하는 일을 하다 결혼을 했고 딸내미 세 살, 아들네미 두 살 때 다시 고향 소향으로 내려왔다. 그때부터 식당일, 벌목, 옷 장사, 포장마차, 복숭아 농사, 삽목 같은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오며 살아왔다. 힘들었지만 그 시절 엄마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먹고 살기 위해 뭐든지 해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많은 일을 하며 살아 왔으니 이젠 좀 일을 덜어도 될 테지만 권옥희씨는 지금도 몸을 놀리지 않고 일을 해야 더 편하다고 한다.
“딸 하나 아들 하나 연년생으로 낳았는데 지금은 딸 하나만 있어. 우리 아들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 군대 제대할 날짜 남겨놓고 마지막 휴가를 나왔는데 그때 차 사고로 하늘나라로 갔지. 우리 아들같이 좋은 아이가 없었어요. 참 잘생겼어요. 나는 못생겼는데 우리 딸이랑 아들이 예뻐. 아들 하늘나라 가고 나서 일주일 만에 큰 손자가 태어났어요. 그러니 우리 딸이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 자기 몸은 만삭인데 동생이 그렇게 됐지, 엄마는 밥도 안 먹고 몸져 누워있지. 우리 아들을 대천 앞바다에 뿌려줬거든. 우리 아들이 친구들이 참 많더라고. 형들도 많고. 고등학교 선생들 찾아오고 군대에서도 높은 사람들도 찾아오고, 우리 아이가 참 착했어요. 고등학교 때도 알바해서 나한테 90만원을 가져다주데. 우리 아들 주변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참 많이도 찾아왔어. 우리 아들이 생전에 좋은 사람이었었나 봐. 쉬고 있으면 아들 생각이 나서 차라리 일하고 있을 때가 더 편해.”
십구 년이 지났지만 먼저 떠난 아들에 대한 이야기는 차마 더 할 수 없다고 했다. 아들이 떠나던 해에 새로 집을 짓고 딸의 가족들과 살림을 합쳤다. 아들은 손주를 남겨놓았고 이듬해에는 딸에게서도 손주가 태어났다.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힘내서 다시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이유들이 생긴 것이다.
“고향으로 내려와서 안 해본 일 없어. 식당일도 다니고 산에 벌목하러 다니기도 했어. 봄에는 삽목하러 다니고 가을에는 양파모종도 심고 전에는 장날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옷장사도 했지. 처음에는 수줍어서 팔지도 못했어.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엄마들은 뭐든지 다해. 닥치는 대로 다 해버렸어. 그 뒤로 식당일을 했지. 그렇게 악착같이 일하니까 알짜 돈이 모아지더라고. 내가 그 전부터 사람들 모아서 일하는 것을 잘했어. 일종의 작업반장이지. 그래서 그런가 지금도 일 필요하면 나한테 전화가 많이 와. 어디에 일 있다 하면 내가 동네사람 모아서 단체로 일하러 다니는 거지. 아들 보내고 이집을 짓고 딸이랑 같이 산거야. 그 해에 참 많은 일이 있었어. 아들 가고 손주 태어나고 집 지어서 함께 살면서 아픔을 치유하면서 살았어. 손주들 키우면서 사랑을 온통 쏟아 부었지. 그러면서 사니까 응어리들이 많이 풀어지더라고. 나도 딸한테 의지를 하고 딸도 나한테 의지를 하고 서로 무너지지 않게 의지하며 살아난 거야. 딸이 없으면 허전해.”
그렇게 속절없이 아들을 떠나보내고 평생을 일만 하며 살아온 곽옥희씨는 그래도 담담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사랑하는 딸과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손주 준석이, 수민이가 곁에 있고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지만 아직 제 힘으로 해나갈 수 있는 작지만 소중한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배풀고 살다보니까 사람이 내 옆에 붙어. 수양딸을 삼은 딸이 두 명이나 있어. 이상하게 수양딸이 삼아지데. 전주 평화동 사는 수양딸은 우리 딸 친한 언니인데, 우리 아들 장례식장에서 남인데도 집에 가지도 않고 삼일 동안 일손을 도와주네. 그 아이가 나를 엄마 삼고 싶데. 그래서 수양딸 삼은 거지. 그리고 또 한 수양딸은 예전에 예향가든 앞에서 붕어빵을 팔았어. 인천에서 살던 애여. 하던 사업이 망해서 도망치듯 여기로 내려와서 붕어빵을 판 거지. 째깐애 들쳐 업고 장사를 하더라고. 그래서 그 아이를 내가 봐줄 테니 우리 집에 두고 일하라고 했어. 그게 고마웠는지 엄마 삼고 싶다고. 그래서 수양딸이 또 생긴 거지. 이날 까정 친정 엄마처럼 돌봐주고. 얘네들도 여전히 변함없이 나를 엄마처럼 생각하고 따라. 아들 떠나고 생긴 인연들이야. 전 같으면 모르는 사람들이랑 그렇게 엮일 일이 없잖아. 아들 보내고 나니까 다 돌봐주고 싶고 안아주고 싶고 그랬어. 아들은 먼저 갔지만 우리 딸 있지. 수양딸이 둘이나 생겼지. 손자들 준석이 수민이 있지. 나는 참말로 든든해.”
오래 전 어느 날, 열아홉 살 시골 아가씨가 보따리 하나 싸매고 소양에서 전주역까지 걸어가며 서울로 돈 벌러 가던 그 길을 어렴풋이 따라가 본다. 그 아가씨가 미싱 공장으로, 식당으로, 시장으로, 산으로, 들로 돈 벌러 다니던 그 오십년의 세월을 아득하게 더듬어 본다. 아들을 잃던 날과 새집을 짓던 날, 손주들이 태어나던 날과 새로 맺어진 수양딸들의 손을 잡아보던 그 애틋한 날들에 대해서도 눈을 감고 천천히 떠올려 본다. 평생을 힘들게 일하며 그녀가 얻었던 그 귀한 것들이 앞으로도 오랜 동안 그녀 곁에 함께 있어주길 소망한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