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 피는 정농마을] 척박한 땅에 억척스레 일궈낸 봄날 꽃 잔치 2017-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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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땅에 억척스레 일궈낸 봄날 꽃 잔치
정착농원이라 불린 실향민의 마을
4월 이서면 용서리 정농마을에 바람이 분다. 포근하다. 얼마 전만해도 나무에 올라왔던 새싹들은 꽃을 만개했다. 사람들도 바빠졌다. 정농마을에 봄이 완연하다.
마을은 100여 가구가 훌쩍 넘는다. 마을의 규모가 크다보니 2개 마을로 분리·운영된다. 이날 찾은 정농1마을은 주민 상당수가 이북에서 넘어 온 실향민들이다. 살기위해 ‘악착같이’ 일을 해온 사람들. 그래서 이곳은 부지런한 마을로 불린다.
△ 봄이 오니 식탁에도 푸르름이
“밥 여기 더 갖고 가. 손님들도 얼른 여기 앉아 잡숴.”
마을회관 문을 열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난다. 어르신들은 밥을 퍼고 음식을 나르느라 분주하다. 회관은 점심시간이면 늘 북적인다. 모였다하면 30명은 기본. 이웃들이 늘 같이 식사를 하다 보니 쌀 한가마니 먹는 것쯤은 우습다. 후식으로 즐기는 믹스커피도 한 박스면 열흘도 채 안돼서 동이 난다.
이날의 메뉴는 시금치나물, 미역줄기, 멸치볶음, 지난 가을 이웃들이 함께 담군 김장김치,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 시골의 밥상은 늘 그렇지만, 참 정갈하고 다정하다.
“계절 바뀌면 우리 반찬도 바뀌지. 봄이니까 푸성귀로 바뀌는 거야. 내일은 머우대 먹으려고 지금 한소끔 삶고 있잖어. 아까 아침에 캐온거야. 낼 올쳐?”
누군가는 밥을 하고 상을 편다. 이때는 니 일, 내 일이 없다.
“집에서는 요만큼만 먹어도 여그만 오면 더 먹어. 혼자만 밥 차리는 것이 아닝게 밥 차리는 것도 귀찮지 않고 재밋지. 우리는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먹는거야.”(배심연·79)
△ 같은 아픔을 가진 가족 같은 이웃
정농마을 계절별로 전국 여행을 다닌다. 4월에는 삼천포로 여행을 다녀왔다.
주민의 대다수가 이북에서 온 실향민들. 같은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더욱 서로를 의지하고 가족처럼 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실향민들이라 아무것도 없었어. 부지런해야 살았지. 그땐 보리밥도 없었어. 누구는 그럼 그때 라면먹지 그랬냐고 하는 사람도 있드만.(웃음) 오남매를 뒀는데 키우는데 우리도 힘들고 애들도 힘들었어.”(우순례·69)
떠나온지 수 십 년. 본능처럼 문득, 고향 생각을 떠올리는 이들은 가끔 함께 고향의 음식을 해먹는다.
“거기는 먹을 게 없으니까 여기처럼 고기만두가 아니라 김치만두를 먹었어. 크기가 손바닥처럼 크지. 전에 와일드푸드축제 때 우리 고향 만두를 팔기도 했어.”(오경옥·81)
가끔 실향민들을 위한 모임은 고향 사람들을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오는 5월5일 서울에서 열리는 이북도민회도 그렇다.
“예전에 거기 갔다가 고향 앞집에 살던 사람이 지나가는 걸 봤어. 버스에서 부리나케 내려서 보니까 그 사람은 지금 인천 사나봐. 그 사람이 탄 버스에 인천이라고 써있더라고. 이제는 죽었다네.” (안옥봉·80)
△ 배꽃이 넘실, 봄기운이 물씬
(위) 이용녀 할머니가 길가에서 쑥을 캐고 있다. (아래) 길가에 핀 이름모를 들꽃.
길가에 들풀이 폈다. 나비가 날아다닌다. 누군가는 호박을 심는다. 바지런히 풀을 메고 좋은 볕을 친구삼아 쑥을 캔다.
길에서 만난 이용녀(77) 할머니는 길가에 앉아 쑥을 캐고 있다. 얼굴을 간질이는 봄바람이 쑥을 캐기 좋은 날씨다. 욕심 없이, 딱 한 끼 해먹을 만큼의 양. 할머니가 캔 여린 쑥은 흰 비닐에서 봄빛을 발하고 있다.
“내동 경로회관에 있다가 방금 나왔어. 요놈 캐서 국 해먹으려고. 오늘은 날이 참 좋네.”
쑥을 캐는 할머니 뒤로 탈탈탈. 거름을 싣고 마을을 부지런히 오가는 기계음이 들린다.
“포도밭에 가고 있어요. 우리 마을은 배꽃이 피면 참 예뻐요. 온 마을이 꽃밭이 되죠.”(백행금·54)
봄이 지나고 곧 여름이 올 터. 참으로 짧은 계절. 그래서 더 아름다운 봄날이다. 배꽃이 넘실대는 정농마을에도 일년 중 찰나의 계절인, 아름다운 봄이 넘실대고 있다.
[정농마을은...]
1950년대 정부에서 국유지에 실향민들을 위한 마을을 조성한 곳이다. 당시 이름은 정착농원 마을. ‘각시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산다’는 말처럼, 마을의 토양이 황토라 조금만 비가 내려도 땅이 질척거린다. 과거 풀도 안 나오는 황무지를 정착한 주민들이 먹고살기 위해 땅을 개간해 지금의 밭이 됐다. 마을은 과수농사를 많이 짓는데 그 중에서도 배농사를 많이 한다. 황토라 고구마 농사도 많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