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 피는 정농마을] 바둑 사랑 여성열 할아버지2017-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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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 사랑 여성열 할아버지
밭일하다 손님 오면 바둑 두러 가기도
지난해 봄,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은 전국을 바둑 열풍으로 들끓게 했다. 누구 못지않게 그 상황을 관심 있게 지켜본 한 사람. 여성열(75) 할아버지가 그 주인공이다. 성열 할아버지의 텔레비전 화면은 항상 바둑채널에 고정되어 있다. ‘박정환, 이동훈, 신진서….’ 대중에겐 다소 낯선 프로 바둑기사들의 이름도 그의 입에선 술술 나온다. 성열 할아버지가 텔레비전을 틀어 바둑을 볼 때면 아내 박순례(73) 할머니는 슬며시 그 자리를 피해 안방으로 향한다.
“남편이 밭에 나가 일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만사 제쳐두고 집에 가서 바둑을 뒀어. 그러니 내가 얼마나 지겨워.”
황해도가 고향인 그는 7살 때 피난길에 올랐다. 전남 해남과 전북 군산을 거쳐 이서 정농마을에 정착해 결혼도 하고 4남매를 번듯하게 키워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은 대부분이 그랬듯 몹시 가난했다. 집안은 형제들로 북적였고, 밥이 없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고픈 배를 부여잡고 산과 들로 나가 열매를 따먹거나 칡뿌리를 캐서 먹는 것이 일상이었던 시절. 바둑에 눈을 뜬 것도 그때쯤이었다.
“군대에서 분대장에게 처음 바둑을 배웠어. 제대 후에는 마을에서 바둑 좋아하는 형, 동생들이 모여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지. 다들 실력이 비슷했는데 서로 배워가며 열정적으로 했어.”
바둑돌 살 돈도 없던 시절. 그 시절은 바둑을 어떻게 뒀을까?
“바둑돌 살 돈이 어디가 있어. 그때 짚신신고 다닐 적인데 검정고무신, 흰고무신 주워다가 동그랗게 잘라서 바둑돌로 썼지. 부족하면 부잣집 가서 몰래 가져오기도 하고. 사료포대에다가 선을 찍찍 그어서 바둑판으로 썼지.”
바둑을 못두는 객을 배려한 오목 한판승부
바둑에 한창 빠져있던 때 부부는 결혼했다. 신혼인데도 바둑에 정신이 팔려 일도 안하고 바둑 두러 나가는 남편 때문에 3년을 고생했다고 말하는 아내. 성열 할아버지가 곧바로 반박하신다.
“말은 바로 해야지. 일을 왜 안 해. 내 할 일만 딱 끝나면 나가서 놀았어. 내가 철이 없긴 없었지.(웃음)”
요즘 성열 어르신은 같이 바둑 둘 사람이 없어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으로 만족하신다고. 집을 찾아 온 낯선 객이 그래서인지 더 반갑다.
“그나저나 자네는 바둑 좀 둘 줄 아는가? 에이, 바둑도 못 두면서 뭣하러 왔어.”
사돈에게 선물받은 귀한 바둑돌
성열 할아버지가 바둑을 못 두는 객을 위해 오목 한판 승부를 시작한다. 아마추어 7단인 사돈이 선물했다는, 프로들이 쓰는 고급 바둑돌로.
“기원 같은 데는 가본 적이 거의 없어. 바둑 안 둔지 너무 오래돼서 눈으로는 둘 수 있는데 이제는 못 두겠어. 자네 다음번엔 바둑 좀 배워서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