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 피는 정농마을] 황해도에서 피란 온 한광군-오경옥 부부2017-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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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정농마을이 우리 고향이지"
황해도에서 피란 온 한광군-오경옥 부부
정농마을에 산지 어느덧 60여년. 14세에 피난을 나온 학생은 이제는 그 시절을 떠올리는 마을의 최고령 할아버지가 됐다.
한광군(85)-오경옥(81) 부부는 모두 고향이 황해도이다. 광군 할아버지는 풍해면, 경옥 할머니는 운유면이 고향. 마을 친구를 통해 알게 된 둘은 군산예식장에서 식을 올렸다.
“싫지 않으니까 시집왔죠. 지금이야 배도 나왔지만 예전에는 날씬했어요. 그전에는 이렇게 안 생겼지. 군산에서 식 지내고 택시를 타고 여까지 온 것이 그게 신혼여행이나 같은 거에요.”(경옥 할머니)
“그때 기억나죠. 우리 둘을 맺어준 사람은 나보다 한 살 밑에였는데 벌써 저 세상으로 갔어요.”(광군 할아버지)
광군 할아버지는 20대 초반에 정농마을로 왔다. 풀도 안 난다는 황무지였다. 마을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밭을 개간했다.
“지금 이 땅들은 전부다 마을 사람들이 일군 거 에요. 지금 이 집터도 내손으로 일궈서 만든 거죠. 전부 다 황무지였어요. 우리가 지금 배농사를 짓는데 그때 그 배나무도 우리 할마이하고 제가 다 심은거죠. 지금은 며느리가 그 농사를 짓고 있지만.”
“처음엔 복숙나무도 심었고, 논도 조금 짓고. 그땐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불 때놓고 밥 해먹고. 딸기 따서 남부시장에 팔러 가고. 그때는 여기 버스도 안 들어왔어요. 이야, 그때야말로 참말로 옛날이다. 하여간 돈 될 만한 건 다 했어요.”
마을 사람들은 황무지였던 땅을 모두 개간했다. 노부부도 그들 중 하나였다.
부부는 기억을 더듬어 피난오던 시절을 떠올린다. 행복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래서인지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열여덟에 나왔는데 기억이 왜 안 나겠어요. 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고향에서 중핵교 다니다가 책보도 내버린 채로 나왔어요. 저 중3때 6·25가 발발했거든요. 아구리선(전차상륙함)이라고 알아요? 입 벌린다고 해서 아구리선이라 불렀는데. 그거 타고서 군산까지 와서 해망동에 있는 수용소에서 한 3년을 살다가 왔어요.”
한 할아버지는 ‘운이 좋게’ 어머니와 5남매가 함께 피난을 나왔다. 그리고 정농마을에 정착했다.
“그 배가 금방 왔다갔다하는 배가 아니에요. 못 나온 사람들 많죠. 자기 가족도 같이 못나온 사람도 많은데. 우리 어머니는 5남매를 다 데리고 나왔어요. 그래서 하나도 낙오 없이 그대로 키워서 시집장가 다 보냈어요. 참 다행한 일이죠. 안사람은 힘들게 살았어요. 부모님 여의고 고생 많이 했어요.”
이곳에 정착한지 수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태어나고 자란 그곳이 생각날 때가 있다.
“아, 고향 생각 날 때 있죠. 텔레비전에서 고향 이야기가 나오면 자연적으로 생각이 나요. 그래도 고향은 안 가고 싶어요. 너무하잖아요. 평화(통일)가 됐다하면 한번 관광은 가보고 싶어요. 이 마을에 자기 살던 마을 구경 갈 사람은 많아요. 우린 이젠 다 늙어서 평화는 안 될거고. 가끔 우리 참 잘 나왔다고 그런 이야기하죠.”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 부르지만 부부는 정착해 스스로 땅을 일궈 살아온 곳을 고향이라 부른다. 그것이 이들의 고향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고향이라는 단어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할 깊이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늙었어요. 60년은 살았죠. 우리에겐 여기가 고향이에요.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