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참 특이한 사람 같죠.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특이한 것 같아.”
오전 내내 쏟아지던 가을비가 잦아들 무렵, 장미정원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앞장서던 신재수 씨가 소년처럼 푸른 미소를 지으며 건넨 말이었다. 신재수 씨(1954년생)는 화산면 용수마을의 8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열정 가득한 아이로 소문이 났던 그였다.
세월이 흘러 그 시절의 모습을 온전히 알 길은 없지만, 지금도 언뜻언뜻 비치는 그의 푸른 눈빛에는 어린 날의 영혼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만 같다. 1980년대 산업화의 가속화로 농촌 청년들이 저마다 도시로 떠나던 시절이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고향에 남아 마을의 '공유 아들'을 자처하며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스물아홉 살 무렵, 집안 사정으로 인해 제 손으로 피땀 흘려 일군 과수원을 정리하고 결국 도시로 향해야 했다. 그렇게 떠난 지 40여 년 만에, 그는 마침내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2015년부터 고향으로 내려올 준비를 했다. 친구가 운영하던 민들레동산 옆에 땅을 사서 꽃동산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말마다 부천에서 완주로 오가며 땅을 일궜다. 처음에는 철쭉을 심었다. 그런데 한해를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다시 장미를 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나씩 꽃을 심고 가꾸어 지금의 장미농장이 탄생했다. “고향 친구들도 오다가다 들르고, 꽃 좋아하는 사람들도 와서 쉬어가라고 만든 거예요.” 2025년 3월 직장에서 은퇴하고, 한 달 뒤 아내 성하숙씨와 함께 완주로 내려와 터를 잡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사람을 맞아들이는 공간 사람들이 찾아와 쉬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있었는지도 모른다. 신재수 씨의 집에는 사랑채가 있었다. 부모는 집에 오는 사람은 누구든 밥을 먹이고 재워 보내야 한다고 했다. 손님을 대하는 것은 형편과 상관없이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채에는 늘 사람들이 모였다. 먼 곳에서 소쿠리 같은 것을 이고 지고 와 쌀로 바꾸던 사람들도 신재수 씨 집에서 묵어갔다. 마을에 제사가 있는 날이면 어른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는 어린 나이에도 또래 친구들보다 어른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랑 어울려 놀다 보니 나는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러웠어. 또래들이랑 이야기하면 유치했지. 어른들이 모여서 옛날이야기를 하는데, 그 이야기가 대부분 남 도와줘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로 끝나는 거예요. 어느 날 어른들이 나한테 그러는 거여. ‘너는 가난하게 살 것이다, 맨날 남 도와주는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으니까.’ 그래서 그런가 남 퍼주는 인생이 각인된 거지.”
고모를 따라 암자에 다니며 수련했던 경험은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그때부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다고 했다. “지나가다가도 누가 앉아 있으면 못 지나가. 쫓아가서 어디 아픈 데 없냐고 물어보지.
남을 살리기 위해서 중학교 때 나름대로 해탈을 한 것 같아.” 그의 관심은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 때는『새농민』잡지를 보다가 과수 묘목 판매 광고를 발견했다. 중앙종묘에 직접 편지를 써 복숭아 묘목 300주를 받아 과수원을 만들었다.
논산 채운면에서 딸기 모종도 들여와 화산지역에 퍼뜨렸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비닐하우스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집안 형편이 넉넉해 굳이 농사일을 하지 않아도 됐지만 그는 땅을 일구는 일이 좋았다.
“내가 거침이 없었어. 중학교 1학년 때 과수원을 만들어서 3학년 되니까 꽃이 만발하는데, 내가 해놓고도 너무 기쁜 거야. 태어나서 그렇게 기쁜 적이 없었어요. 처음이지. 나는 농사일이 참 좋았어요. 땅 일구는 게 좋았지.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야.”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집배원 일을 시작했다.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우편물을 배달했고, 오후에는 농사를 지었다. 당시 마을에 젊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또래 청년들은 대부분 도시로 떠났고, 마을에 남은 청년은 친구와 자신뿐이었다. 자연스럽게 마을의 여러 일을 맡게 됐다.
“마을에 청년이 없으니 온갖 고된 일을 다 했지. 마을에서 우리 집에만 리어카가 있었어요. 그러니 동네 사람들이 방아 찧어달라고 나만 찾아와. 누군가 돌아가시면 몇십 리 떨어진 골짜기까지 부고 전달하러 집집마다 돌아다니고 새벽에는 묫자리 파고 상여 매고. 어려서부터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 나한테는 365일 떠들라고 해도 떠들 수 있을 만큼 경험이 많아.”
그 경험 쌓인 손과 발은 거북이 등처럼 두껍고 거칠었다. 도시에서는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영등포에 있던 열관리학원을 다니며 국가자격증을 취득했다. 잠실 미주아파트 관리사무실 보일러실에서 일을 시작했고 1985년 무렵 입사한 한방병원 관리시설팀에서 38년 동안 근무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사람을 돕는 일은 계속했다. 어려운 사람을 태우기 위해 구급차를 직접 운전했고, 돈이 없다고 하면 돈도 빌려주거나 주었다. 자세 교정하는 법을 터득해서 20년 동안 무료로 봉사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짜짜짜짜짜 짱가~’로 시작하는 추억의 만화 주제가가 생각난다.
이쯤에서 그의 아내 성하숙씨의 눈치를 슬쩍 살피게 된다. ‘짱가’같은 남편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어떠하신지..
“처음에는 잔소리를 했지만 소용없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되었어요.(해탈한 웃음) 그런데 이 사람은 항상 좋은 방향으로 가요. 우리 친정에서도 이 사람 인정해요. 사막에 버려져도 살아날 사람이라고. 황무지에서도 반드시 꽃을 피울 사람이라고.”
신이 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높아진 신재수 씨가 결정적인 명언을 남겼다. “남을 도와주는 게 절대 손해가 아니야. 내 경험이 풍부해졌잖아요. 그러니 마음은 부자야.” 지나온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긴, 그야말로 ‘신재수다운’ 말이었다.
그가 정성껏 꽃동산을 만들어 사람들이 쉬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의 뿌리는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네 어른들 틈바구니에 섞여 놀다 스르륵 잠들곤 했던 사랑채.
마당을 밟는 누구에게나 자리를 내어주고 밥 한 끼 대접해 보내던 그 시절 집의 온기가, 지금은 꽃과 나무가 숨 쉬는 쉼터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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