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난 양말을 기우거나 셔츠에서 떨어진 단추를 다시 달려면 반드시 실과 바늘이 필요하다. 여전히 장롱이나 서랍 한구석에 반짇고리가 자리하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옷이며 양말이며 뭐든 물자가 풍부해진 요즘 시대에 어지간해선 반짇고리를 꺼낼 일이 없다.
하물며 바느질로 옷을 짓거나 이불을 꿰매는 일은 흔하게 볼 수 없는 풍경이 되어 버렸다. 그런 만큼 고산면 양야리에 살고 계시는 이기선 할머니(41년생)의 바느질 자부심은 대단했다. 주방과 거실 사이에 달린 흰 코바늘 커튼도 그의 손으로 직접 만든 작품이다.
“김제 금산면 청도리에 백운동이라고 있어. 내가 거기서 살았는데 그 동네 언니네 집에 가서 바느질, 뜨개질을 배웠지. 우리 엄마가 나 17살에 돌아가셨거든.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그 언니한테 ‘우리 기선이를 좀 뭐시든지 가르쳐라’ 그런 소리를 했드리야. 그 소리 하시고 얼마 안 있다 돌아가셨어.
그 언니한테 많이 배웠어.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엄청 꼼꼼해서 토시고 조끼고 딱 맞아야 입어. 어렸을 때부터 우리 아버지가 옷 해 입고 다니는 걸 보고 자랐지.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 옷매무새를 깔끔하게 다듬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내가 했지. 내가 손은 고와. 어려서부터 흙은 안 만져봤어.
시집와서도 그렇고 평생 바늘만 잡았지. 생각해보면 편하게 살았던 거 같아. 애들 아버지도 나 험한 일 안 시켰거든. 나 시집와서 남의 두루마기 하나 꼬매주면 6일을 와서 밭을 매줘. 그렇게 일종의 거래를 한 거지. 그래서 나는 시집와서 고생안했어. 빨래도 빨러 안 가고 밭도 매러 안가고 그랬어.
시누들이 우리 밭일 해주는 대신 나는 그네들 바느질을 다 해줬지. 예전에는 동네 마다 자방침 장수가 돌아다녔어. 시집와서 산 이 자방침을 여태껏 쓰고 있어.”
두루마기 한 벌을 꿰매주는 대가로 6일 동안 밭을 매주는 노동을 서로 교환한 셈이다. 바느질을 잘 한다는 것은 그 시절에 일종의 고급 기술이었을 것이다. 그는 재봉틀을 ‘자방침’(재봉틀의 방언)이라고 불렀다.
미싱이라는 말은 재봉틀을 영어로 Sewing Machine이라고 하는데 일본에서는 Machine을 미싱이라고 줄여 불러서 그 말이 우리나라로 들어와 한때 미싱이라는 말이 통용되지 않았나 싶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한약방을 하던 아버지와 온 가족이 김제 백운동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다 당시에는 다소 늦은 나이인 스물일곱에 이곳으로 시집을 오게 됐다고 했다.
“결혼이 늦은 편이었어. 우리 아버지가 혼자 사니까 아무래도 같이 있으려고 안 가고 있었지. 아버지가 원체 대쪽같아서 그걸 감당할 사람이 없을 것 같더라고. 시집와서도 친정가서 아버지 이불 빨아놓고 옷 빨아서 꼬매놓고 그랬지.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나를 좋은 집에 여의고 가셨지.
선보러 오는 사람이 사주단지를 가지고 왔는데 우리 아버지가 사주도 좀 잘 보고 그랬거든. 가만히 보더니 우리 기선이 쌔려 죽이지는 않게 생겼드리야. 순해서. 아 그 시절에는 여자들이 참 많이 맞고 살았잖아. 나는 한 번도 안 맞고 살았어.
애들 아빠 이름은 성귀학, 우리 큰 딸이 수항이거든, 그래서 우리는 동네에서 수항이 아빠, 엄마라고 불러. 나는 다음에 태어나도 수항이 아빠랑 살고 싶어. 참 착하고 순했어. 그래서 내가 대신 싸낙배기였어. 우리 수항이 아빠 건들면 내가 가만히 안 있었어. 대신 나서서 멱살잡고 흔들고 그랬지.
언젠가는 우리 수항아버지를 건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몇 날 며칠 찾아다녔어. 나 혼자 가서 6일 만에 잡아서 엄청 뭐라고 했지. 술만 먹으면 형편없는 사람이었지. 그 뒤로 몇 달 만에 와서 죄송하다고 빌더라고. 암튼 나는 그런 꼴은 못 봐. 우리 주인양반 건들면 누구라도 가만히 안뒀어.
수항이 아빠 돌아가신지 6년 되얐는디 내가 멋을 못내. 신랑죽었는데 멋 내고 다닌다는 소리 들을까봐. 옷도 함부로 못 입겠더라고. 원래 멋쟁이야. 여름에는 내가 만든 모시적삼 입고 장날에 나가면 뒤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들려. ‘하이고 저 옷 해 입은 거 봐.
부잣집 마나님이네.’ 그런 소리가 들려.”
이기선 할머니의 바느질에 대한 자부심은 참 대단했다. 바느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호랑이 선생님 같다가도 직접 손으로 꿰맨 모시 이불을 펼쳐 놓고 ‘자 이거 좀 봐’ 할 때는 아이같은 미소가 얼굴에 가득 담겼다.
“이 모시 이불은 다 손으로 꼬맨거야. 이것을 자방침으로 박으면 모시가 빳빳한 게 걸리석 거려. 손으로 감쳐서 꼬맸다고 하면 다 깜짝 놀라. 나는 어디 놀러 안 다녔어. 마을회관을 통 나갈 수가 없어. 방 안에 앉아 늘 바느질을 했으니까. 어려서부터 아버지 옷매무새 정리하면서 바느질이 손에 익은 거지.
아버지를 닮은 것 같아. 우리 아버지는 약을 좋은 놈으로만 지어. 탁 나고 버러지 나는 것은 다 앉아서 개려. 참 정성스러운 분이셨지. 아버지는 살아생전에 나한테 늘 착하게 살아라. 넘한테 속 뺏기지 말아라. 속 뺏기면 절대 못 찾는다. 그 소리를 많이 하셨지.
나 시집와서 우리 애들 아빠랑도 아들딸 키우면서도 그 소리 하는 것이 일이었지. 속 뺏기면 절대 못 찾는다. 자기중심을 잡고 살으라는 뜻이여. 괜히 돈에 현혹되지 말고. 거짓말하지 말고. 나는 아들딸을 다 그렇게 가르쳤어.”
이야기하는 내내 할머니는 직접 바느질하거나 뜨개질해서 만든 핸드백이며, 옷이며 이불들을 펼쳐서 보여주셨다. 나 혼자 보기가 아까웠다. 전시 공간에서 전시를 해도 좋을 생활 속 작품들이다.
할머니의 바느질 기술이 아까워 누군가에게 가르칠 생각이 없냐고 여쭸는데, 누가 이 성가신 일을 배우겠냐고, 혹시 나보고 배울거냐고 되물으셨다. 바느질에 그닥 소질이 없는 나는 혹시 바느질을 잘 하는 방법이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그냥 실이랑 바늘만 있으면 되지 더 뭐가 필요하냐고 장인다운 선문답을 하시기도 했다.
“나같이 이렇게 만드는 사람 없어. 이것들을 못 버리겠어. 내 소중한 보물이야. 진짜. 내 인생을 돌아보면 남는 것들이 다 이것이지. 그리고 6남매 다 착하게 커 준거. 그런 것이 참 좋지. 내가 마음을 비우고 살면 아무 걱정이 없어. 아들딸 전부 순하고 며느리 사위들도 참 좋아.
그래도 나는 기대서 살고 싶지 않아. 그냥 자유롭게 내 집에서 사는 거야. 마음을 비우고. 6년 전에 주인 양반 먼저 떠나고 마음이 좀 그렇긴 하지만 애들 아빠 죽기 3년 전에 실컷 자기 친구들이랑 놀러 다니라고 그랬어. 그때 그 양반이 원 없이 놀러 다녔지.
그래서 돌아가셨는데도 마음에 걸리는 것은 없어.”
바느질과 뜨개질을 잘하는 사람들은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차분하고 진득하다. 뭐든 빠르게 변하는 우리 시대에 새겨볼 만한 덕목들이다.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에는 바느질과 뜨개질 고수들이 꽤 있다. 이기선 어머니가 자신의 기술을 배우고 싶으면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다.
17살의 어린 이기선이 동네 언니에게 바느질을 전수받았듯이, 고운 모시천으로 내 몸에 꼭 맞는 옷 한 벌을 내 손으로 지어 입고 싶은 사람들 손 드세요. 함께 갑시다.
/글·사진=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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