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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별곡] 가을은 역시 푸지다202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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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역시 푸지다


마침내 가을이다. 날씨라는 게 시나브로 바뀌는지라 몸은 이미 이 새로운 계절에 길이 들었지만 지난 여름은 무척 더웠더랬다. 덥지 않은 여름이 어디 있으랴만 되돌아보면 그렇다는 얘기다. 굳이 뒤를 돌아 무더위를 불러오는 까닭은 찬 바람이 불어도 이 지구는 계속 뜨거워지고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아무튼 가을이다.


가을은 하늘이다. 올해는 하늘빛이 여느 해보다 눈부시진 않지만 그래도 높고 파랗긴 매한가지. 하도 맑아서 손을 높이 벋어 손가락으로 살짝 찍으면 동그란 물결이 번져갈 것만 같다. 뭉게구름이라도 하나 둘 둥둥 떠 있으면 그것으로 가을 정취는 완성.


그 하늘 아래로는 황금빛 물결이다. 바로 이맘때, 열흘 남짓만 반짝 누릴 수 있는 눈부신 빛깔. 저 파란 하늘과 황금빛 들녘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벼농사두레는 해마다 황금들녘 풍년잔치를 벌여왔다. 올해 잔치는 4년 만에 펼쳐졌다. 지난 3년은 코로나 팬데믹과 흉작이 겹쳐 눈물을 머금고 건너뛰었더랬다. 그 대신 풍상들녘 위로잔치힘내잔치니 회원들끼리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 아쉬움을 달랬었다.


아쉬우면 절실함도 커지는 법일까? 많은 이들이 가을날을 함께 누렸다. 벼농사두레 회원 말고도 이름을 모르고, 얼굴이 낯선 이들이 여럿이었다. 프로그램이라야 논배미에서 메뚜기 잡고, 가을들녘을 화폭에 담는 예술제와 신발 던지기, 제기차기, 단체줄넘기, 이어달리기 따위 별다를 게 없었지만 분위기는 뜻밖에 후끈 달아올랐다. 불쑥 경쟁심이 차올랐거나 저마다 내놓은 상품에 군침이 돌았거나. 아무렴 파란 하늘과 선선한 바람, 알맞은 햇발 아래 펼쳐진 가을 잔치인데 재미가 없었다면 그건 다 자기 탓이다.


그리고나서 며칠이 흐른 지금 황금들녘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수확기계(콤바인)가 야금야금 먹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엊그제가 우리 논 첫 수확이었다. 기계가 자꾸 고장나 멈추는 바람에 애를 먹었지만 그래도 스무 마지기 넘게 해치웠다. 가을장마가 이어지는 통에 병충해가 번져 걱정이 컸는데 막상 거둬들이고 보니 소출이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다행이다. 더불어 올해는 여느 해보다 일찍 가을걷이를 시작한 덕분에 한결 마음이 가볍다. 햅쌀을 고대하고 있는 소비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보낼 수 있어서다.


첫 수확을 끝낸 저녁 무렵, 그렇게 가벼워진 발걸음을 미디어센터 옥상으로 옮긴다. 별빛이 총총한 옥상에서 밤새도록 영화 여섯 편을 보는 <고씨네 별밤극장>이 펼쳐지는 곳이다. 고산권 주민 영화동아리 고씨네회원으로 함께하고 있는데, 한 달에 한 번쯤 함께 영화를 보고 감상평을 나눈다. 그러다가 완주미디어센터의 위탁을 받아 이번 행사를 기획하고 운영하게 된 것이다.


수 십 명이 정말로 밤을 새워 영화를 봤다. 한 편 한 편 상영이 끝날 때마다 영화토크가 펼쳐졌다. 유명 영화 의상과 소품으로 치장하고 사진을 찍는 코스프레 포토타임에 멋지께 폼을 잡아보고, 출출해지는 한밤에는 때맞춰 라면타임이 펼쳐져 속을 달랠 수 있었다. 가을밤, 아직 익숙해지기 전이니 몹시 차가운 날씨다. 다들 겨울옷에 담요를 둘러 쓰고 찬이슬을 견뎌낸다. 영화상영이 모두 끝난 시각은 새벽 5시쯤, 그 때까지 살아남은사람은 모두 열 댓 명. 초췌하고 피골상접한 몰골로 기념촬영을 하고 영화제는 마무리됐다. 잠을 못 이룬 몸은 찬 기운에 으스스 떨고 있지만 부옇게 동터오는 새벽은 상쾌하기만 하다.


가을은 역시 푸지다. 몸이 가볍고, 입이 즐겁고, 눈과 귀가 호강하는 시절. 시간이 예서 멈추게 할 순 없겠지.


/차남호(비봉 염암마을에 사는 귀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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