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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별곡] 2022-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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햅쌀밥 잔치


늦가을. 황금 물결 일렁이던 들녘은 다시 텅 비어 태초의 흙빛으로 돌아갔다. 황금 물결은 탐스러운 결실로 탈바꿈해 곳간으로 너울너울 흘러들었다. 그리하여 넉넉한 시절이다. 지난 이태, 흉작의 안타까움에 싸늘하던 고산 고을 농부들의 낯빛도 발그레 피어나는 가을이다. ‘풍년가는 언제나 흥에 겨운 법이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건조를 거친 나락, 방아를 찧었다. 벼농사두레 경작회원들이 거둬들인 나락을 모두 찧자니 그 양이 꽤 되어 이틀 걸려 도정을 마쳤다. 논배미 크기에 따라 소출은 제각각이지만 햅쌀 자루를 실어나르는 흐뭇함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것으로 한 해 벼농사는 모두 마무리되었다.


올해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황금들녘 풍년잔치를 건너뛰었지만, 평년작을 웃도는 만큼 풍작은 분명한 현실이다. 곳간을 가득 채운 만큼이나 마음도 넘치는 법이다. 흐뭇함이 넘치는 마당에 햅쌀밥 잔치마저 건너뛸 순 없는 노릇이다. 뜻하지 않게 이태원 참사가 빚어져 모두가 슬픔에 잠겨 있는 상황이지만 우리 벼농사두레는 자리를 펴기로 했다. 다만 잔치라는 이름을 지우고 그저 나누기로 했다. 기쁨은 나눔으로써 커지고, 슬픔은 나눔으로써 작아지는 법이니.


늘 그래왔듯 나누는 자리는 우리 집으로, 햅쌀밥 짓기 또한 자연스레 대농인 내 몫이 되었다. 햅쌀밥이란 게 본시 찬이 없어도 꿀맛인, 그 자체가 밥도둑이긴 하지만 축배를 기울이자면 안주를 곁들여야 한다. 해서 저마다 한 두 점씩 찬거리를 싸 들고 왔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고, 향이 그윽한 밥 한 술의 황홀한 맛에 너도나도 감탄사를 연발한다. 김과 겉절이 김치만으로 다들 고봉밥 한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워대니 준비한 밥이 모자라 거푸 지어 바쳐야 했다. 게다가 여럿이 북적거리며 나누는 만큼 밥맛도 더 당기는 게 인지상정이겠다.


입맛은 아픔과 낫게 하게 슬픔을 잊게 하는 힘이 지닌 모양이다. 사람들은 다시 기운을 되찾았고, 이슥토록 밤공기를 달궜다. 절제된 흥청거림이라고 할까. 어떤 장면이 펼쳐졌는지는 저마다의 상상에 맡기기로 하자. 이태 연속 흉작에 울고, 코비드로 얼룩진 기나긴 터널을 지나 막 기지개를 켜려던 이들을 덮친 참사. 벼두레 사람들이 그 슬픔의 강을 건너는 법.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두 손에는 햅쌀이 담긴 묵직한 자루와 한 회원이 고집스레 지어낸 적갈색 찰홍미 봉지가 들려 있었다.


나눔(이라 쓰고 잔치라 읽는다)은 그렇게 끝났다. 이제부터 농한기가 펼쳐질 것이다. 한동안 사람을 설레게 하고 달뜨게 했던 그 이름. 그러나 이제는 마음의 평화또는 동안거를 가리키게 된 그것. 물론 두말할 것도 없이 농번기보다는 훨씬 좋은 시절. 거기에 들어선 것이다.


벼두레는 그 농한기의 초입, 겨울이 막 시작될 즈음에 작은 여정에 나설 것이다. 내년 한 해, 벼두레는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의견을 나누는 연찬회 또는 회원엠티 되겠다. 충남 서천의 호젓한 바닷가로 떠나기로 했다. 안방에서 진행한 듯 얘기가 안 통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콧구멍에 바닷바람 좀 쐬는 일, 이 중산간 고산에 터 잡고 사는 이들에게는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 가을 끝무렵에 느닷없이 훌쩍 다녀온 화암사, 구름 한 점 없던 그 파아란 하늘. 서천 바다도 아마 그런 빛이겠지.


/ 차남호(비봉 염암마을에 사는 귀농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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