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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의 걸어서] 마라톤, 완주했을까?2019-05-03

[바닥의 걸어서] 마라톤, 완주했을까?


마라톤, 완주했을까?

 

대회 시작 시간은 9시지만 8시까지 가야했다. 전주 월드컵경기장에 도착해서 배에 번호표를 달고 스트레칭을 하고 응원와준 친구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미 마라톤을 마친 것처럼 활짝 웃었다. 제법 추웠지만 상쾌한 기분이었다. 달리기 시작하면 몸에서 금방 열이 날 텐데 내빈격려말씀이 줄줄이 이어지는 개회식 때문에 찬바람 맞으며 30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전날 밤 친구가 이런 상황에 대비해서 얇은 비옷을 가져가라고 알려줬다. 덕분에 살았다.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게 처음이라 무척 힘들었다. 평소 내가 달리는 속도보다 다들 훨씬 빨랐기 때문에 휩쓸려 뛰다보니 금새 지쳤다. 맞바람도 계속 강하게 불었다. 1~2km를 달릴 때까지 조금 힘들고 3km 정도 넘어가면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달릴 수 있는 상태가 되곤 했는데 대회 날에는 1km도 되기 전에 이미 지쳐버렸다. 옆에서 뛰는 사람들이 신경 쓰여서 답답하고 그들이 내는 모든 소리가 거슬렸다. 울고 싶은 심정으로 겨우겨우 한발씩 떼며 달렸다. 물이라도 마시면 좀 나을까 싶어서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뛰었지만 2km가 넘도록 물 마실 곳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대회랑 안 맞는구나. 혼자서 거뜬하게 20km 뛸 수 있었을 텐데 뭐하러 대회에 나온다고 했을까. 대회에서는 옆에 사람들 기운을 받아서 연습 때보다 더 잘 뛸 수 있다던데 나는 아닌가봐. 그러니까 너무 힘들면 그만 뛰자. 좀 오래 뛰다가 힘들면 그러려니 할 텐데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힘든 건 대회랑 나랑 안 맞는 거야. 괜찮아. 그래도 나는 마라토너야.

 

연습달리기 때 느꼈던 개운하고 상쾌한 기분은커녕 갑갑한 상태로 힘겹게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 언제 멈춰 설까, 어디서 그만 뛸까, 그래도 내가 제일 먼저 포기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은데, 그만둔다면 그것은 포기일까 현명한 판단일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뛰었다. 그러다 일요일 아침에 먼 길을 달려 응원와준 친구들을 생각했다. 힘내라고, 즐겁게 뛰라고, 응원한다고 피켓까지 뽑아들고 온 친구를. 내가 마라톤대회에 나가겠다고 하니까 옆에서 함께 뛰고 있는 친구를. 알고 있는 모든 정보와 노하우를 알려준 친구를. 나는 지금 죽을 만큼 힘들지만 죽지 않을 거란 걸 안다. 내가 아니라 그 친구들을 위해서라면 조금은 더 뛸 수 있다. 내게 보내준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그 마음에 대한 응답은 2.5km보다는 더 될 것 같았다. 마음들이 떠올라 울컥해지면서 더 뛰고 싶어졌다. 힘이 나지는 않았다.

 

5km가 넘어가니 빨리 갈 사람은 다 앞으로 간 모양이다. 주변이 조용해졌다. 마음도 한결 편해지고 연습 때처럼 그냥 뛸 수 있게 되었다. 맞아, 사실은 연습 때도 처음엔 힘들지만 좀 뛰고 나면 편해졌었지. 이번엔 시작부터 너무 숨이 차고 힘이 들어서 안정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린 것뿐이야. 10km까지는 주변에 사람이 보이기는 했는데 반환점을 돌면서부터는 명백히 우리가 꼴지였다. 이미 옆 차선은 차량 통제가 풀려 도로 한가운데를 우리만 뛰고 있었다. 뒤에 경찰차가 따라붙고 우리가 지나가면 대회 진행요원들도 퇴근했다. 힘들면 차에 타거나 인도로 걸으라고 하셨지만 이제부턴 언제까지라도 달릴 수 있는 기분이었다.

 

20km를 달렸을 때 2시간 50분이 지나고 있었다. 제한 시간은 3시간이었지만 굉장히 느리게 뛰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없어서 1km를 남기고 경찰차에 탔다. 6분 남았으니 완주 메달과 선물 받아가라고 500m 앞에 내려주신다는 걸 거절했다. “저 힘들어서 시간 안에 못 들어가겠는데요” “그래요? 그럼 100m 앞에 내려줄게요

 

완주는 아니지만 완주 선물 쌀 4kg도 받고, 20km 뛰어보겠다는 목표도 달성했고, 경찰차도 타보는 재미있는 경험도 했다. 다음 마라톤 대회에 또 나갈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달리기는 즐겁다(고 생각한다).


/바닥(bacac) 이보현은 귀촌인이자 자급을 지향하는 독립생활자, 글 쓰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읍내 아파트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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