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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의 걸어서] 시내버스에서 성추행범 퇴치하기2019-01-29

[바닥의 걸어서] 시내버스에서 성추행범 퇴치하기


시내버스에서 성추행범 퇴치하기

나는 오늘도 읽고 말한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이민경 지음)

 

전주 시내에 갈 일이 생기면 바짝 긴장한다. 자가용을 운전해 가기엔 주차와 교통체증이 걱정이라 주로 535버스를 타는데 가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앉아가지 못할 때 다리 아픈 건 물론, 운 좋게 자리 잡고 앉았을 때조차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시끄럽게 휴대전화로 동영상을 보거나 큰소리로 전화통화를 하거나 뒤척거리면서 계속 거슬리게 할지도 모른다. 빡빡한 버스에 실려 다닌 경력은 중학 시절부터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조금이라도 편안해질 묘수는 없다. 복잡한 시간대에는 필요이상으로 몸을 밀착시키거나 엉덩이나 가슴을 만지는 성추행범을 만날 확률이 높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더 긴장된다.


 


초등학교 앞에서 만난 바바리맨(갑자기 알몸과 성기를 보여주며 여학생들을 놀라게 하는 성범죄자)을 시작으로 성폭력 피해의 역사는 길고도 길지만 대중교통 이용으로만 한정하자면 기억 속 최초의 불쾌한 기억은 중학생 때였다. 우리학교 학생을 가득 실은 버스는 다른 학교 앞에서도 학생들을 태워야했기에 더 복잡해졌다. 반 발짝씩 뒤로 걸어오다가 다행히 좌석 손잡이를 잡고 안정적인 자리를 차지해 안심한 찰라 누가 내 손을 슬쩍 만졌다. 버스가 복잡하니까 손이 스칠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창밖을 보는데 손잡이를 붙들고 있는 내 손을 또 누가 또 만졌다. 이번엔 분명히 작정하고 만지는 느낌이었다. 이상하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내가 유난히 예민한 거겠지, 하고 모른 척 하려는데 또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번엔 혹시 누군가가 나한테 신호를 보내는 건가, 등하교길 로맨스일까. 이게 성추행이라고 상상할 수조차 없었으니 어떤 남학생이 매일 같은 버스에서 나를 보고 흠모하다가 오늘 용기를 내어 내 손을 잡으려고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애써 모른 척 했다. 그렇게 계속 손만짐을 당하며 집까지 왔던 기억이 난다. 백번 천번 양보해서 실제로 누군가가 나에게 호감의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지만(적극적 동의 없는 신체 접촉은 폭력이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입장 바꿔 만약 내가 누군가를 좋아해서 신호를 보내고 싶다면 절대 그런 방법은 아니었겠지. 그리고 그렇게 교복 입은 여학생의 손을 만지는 행위를, 어떤 이유로 누가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성추행이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해는 피해자의 상식을 넘어선다. 안타까운 점은 피해자는 언제나, 내가 예민한가, 실수로 부딪힌 거겠지, 어쩌다 자기도 모르게 그런 거겠지, 하고 그 상황을 굳이, 피해로 인식하지 않으려고 반사적으로 생각한다. 직장 상사가 스치듯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졌을 때에도, 모르는 사람이 지하철에서 내 뒤에 바짝 붙어 몸을 비벼댈 때에도 말이다.

 

다른 나라라고 다를 것도 없었다. 미국이었나 멕시코였나 기억도 나지 않지만 시내 버스에 앉아 지도를 보고 있을 때 내 옆으로 바짝 붙어선 남성이 어깨에 성기를 비벼댔던 적도 있다. 내가 어떻게 했을까. 온몸이 얼어붙은 채 꼼짝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었다. 이건 명백히 그의 실수도 호감도 아닌 게 분명하게 느껴졌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말도 안 통하는 낯선 곳에서 무섭고 서럽고 괴로운 시간을 겨우 견뎌 도착지에 내렸다. 그럴 때 피해자가 취할 행동의 정답은 없다. 강도를 만났을 때 도망칠지, 돈을 건넬지, 힘껏 싸워 강도를 제압할지는 개인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른 것처럼. 강도를 잡아 벌을 주고, 폭행이나 협박이 범죄라는 사실을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합의하고 어린 아이처럼 아직 잘 모르는 대상에게 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하는데 그건 사회의 몫이다. 강도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평소에 할 수 있는 일이 개인적으로 있다면 내가 강도가 되지 않기, 강도를 보면 신고하기, 가벼운 폭행이나 협박과 절도가 별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거 정도다.

나는 밤길에 만난 칼을 든 강도에게 저항할 수는 없겠지만 버스에서 누군가 내 가방에 슬쩍 손을 넣어 지갑을 빼내려고 한다면 도둑이야라고 소리는 칠 것 같다. 대중교통에서의 성폭력에 대입시켜 보자면 언젠가 옆자리에 앉은 교복 입은 남학생이 엎드려 자는 척 하면서 슬쩍 허벅지를 만졌다. 역시나 처음에는 실수겠지, 하며 넘어갔는데 두 번 세 번 명백히 의도를 가진 손짓임이 명백하게 느껴졌다. 그 손이 다시 허벅지에 닿았을 때 무척 떨렸지만 용기를 내어 그 손을 덥석 잡아 뿌리쳤다. 그리고 소년을 노려봤다. ‘미스 함무라비라는 드라마에서 박차오름 판사는 지하철 성추행범을 만났을 때 보는 사람이 속시원하게 말과 행동으로 퇴치했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도 아니다.

 

성폭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가해 행위를 안 하는 게 정답이지만, 가해는 언제나 상식 밖이니까 어쩔 수 없이 뭐라도 해야 한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라고 한탄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 나를 둘러싼 세상부터라도, 나부터라도 조금씩 변화면 세상은 바뀌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좋으니까. 나는 오늘도 읽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언어가 필요하다(이민경 지음)>를 가볍게 추천한다.



/바닥(bacac) 이보현은 귀촌인이자 자급을 지향하는 독립생활자, 글 쓰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읍내 아파트에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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