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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의 완주이야기 52] 이서면 남계리2018-10-02

[이승철의 완주이야기 52] 이서면 남계리

[이승철의 완주이야기 52] 이서면 남계리


<조선천주교최초교리당비(朝鮮天主敎最初敎理堂碑)>. 워낙 높아 몇 m라 적시하지 못해 미안하나 우선 ‘최초 교리당’이라는 데 눈이 휘둥글 해 진다. 표지석은 이서면 남계리 초남마을에 있다. 비록 천주교도가 아니더라도 초남리를 모르는 사람은 적다. 세상에서 생명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으랴. 애국자 안중근, 유학자 송시열, 세조조에서 사육신이 처형당했으며 십자가 예수도 마찬가지다.


이 마을 동정부부 이야기가 애처롭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자신의 경험으로 만드는 능력이 있다. 흔히 이순이가 동정생활을 결심한 게 성체를 받아 모신 후 하느님과 일체가 된 ‘자기 몸에 맞게 살고자 동정생활을 결심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옥중 편지’를 보면 이미 어려서부터 동정생활을 결심했다.


이순이와 유중철은 1798년 9월 시부(아버지)인 유항검과 신의 앞에서 동정 서약을 마치고 한 얘기에 ‘어려서부터 바라던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말하였다.” “우리의 만남은 두 사람의 소원을 주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은총이기에 저희 둘이 주님께 감사하는 길은 죽음으로써(순교) 신앙을 지켜 주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라며, 순교를 준비하였다.


비석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인 자료가 더 확신을 준다. 치명자산에는 호남의 첫 사도 유항검과 유중철, 이순이 등 7인 가족묘지가 있고 <치명자산 성당> 벽에는 옥중 편지를 확대해 걸어 두었다.


여기 글을 보고 남계리를 찾는 사람이 하나라도 더 나올수록 반가운 일이다. 유항검이 살던 터 남계리 현장의 안채 건물은 제7대(1967∼1971) 국회의원을 지낸 유범수(柳凡秀) 생시 집이다. 유항검과 유범수는 한 터의 인물임으로 더욱 신묘하다. 유범수 의원이 재임 때 살던 마당에는 역적의 터라며 파헤쳤던 못을 재현해 놓았고, 순례자마다 ‘겟세마네 동산’ 예수의 고난 과정을 묘사해 둔 시설물마다에 간절히 묵도를 한다.


남계리는 대부분 평지로 전북혁신도시가 가까워 땅 값이 높다. 자연부락으로는 대농(大農/쇠평이/金坪里), 초남(草南/초내미/初南里), 신기(新基/새터)가 있다. 대농의 다른 이름 <쇠평이>는 전에 사금이 많이 나와 붙여진 이름이란다. 초남은 남계리의 으뜸 마을이며, 신기는 초남리 북쪽에 새로 생긴 동네이다. 김제시 용지면이 가까워 1994년 경계조정이 있던 곳이다. <바우배기>는 바위와 관련이 있고, 물고기 마을 반교리도 이웃이다. 이서면은 <독도(獨島)>면으로 민원이 있어 군청에 가고, 선거구가 같아 완주지 생활은 완주와 남남이나 다름없다. 운주면 대둔산과 남계리는 50여 km, 이서면을 모르는 운주면민이 많고, 양쪽 주민은 유독 완주에 대한 소속감이 낮은 편이다. 


 /국사편찬위 史料조사위원(esc2691@naver.com)·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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