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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의 완주이야기 46] 삼례(參禮) 무기수(無期囚) 김춘배(金春培)2018-04-03

[이승철의 완주이야기 46] 삼례(參禮) 무기수(無期囚) 김춘배(金春培)



위 사진은 김춘배의 함남 권총의거를 보도한 동아일보(1934.10.22)호외. '순사부장을 또 사격' '신출귀몰 십구일간의 대담한 범적 극적 장면' 등의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 DB)        



삼례(參禮) 무기수(無期囚) 김춘배(金春培)


김창언(金昌彦:18731942) 둘째 아들이 김춘배(金春培:19091946)193410월 함경남도 신창(新昌)주재소 격납고를 습격 무기를 빼앗고, 19일 동안 함경남도를 누비며 일본 순사 부장에게 총격을 가하는 등 우리 고장 제1등 애국 독립투사이었다. 1927(21) 2월 만주 돈화현(敦化縣)에서 이청천(李靑天)장군 정의부군(正義府軍)에 가담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여 간도를 뒤집어 놓았는데 가족을 몰살하겠다는 일본 경찰의 협박에 못 견뎌 자수했다. 탈옥 경력도 있어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8년 동안을 복역했다. 김춘배는 19344월 출감한지 7개월만에 신창주재소 무기고에서 장총 6, 권총 2, 실탄 800발을 탈취 북청(北靑)어업조합을 습격 군자금을 마련해 만주독립군과 합류하려다가 경성행 열차 안에서 붙들렸다. 잡히기 전 19일 동안 동원된 경찰병력과 인력이 2만이었다(1934.10.24 <동아일보>호외 신문 보기).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무기수(無期囚)는 해방이 되어 풀려났으나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6121일 길거리에서 숨져 서울공동묘지에 묻혔다는데 묘를 모른다. 같은 삼례사람 양칠성(梁七星)인도네시아 독립영웅으로 추대되어 대접을 받는다. 교육 수준이 인도네시아보다 훨씬 높은 완주와 삼례는 김춘배 이름 석 자도 기억해 주지 않으니 애국지사의 영혼이나 온 나라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통곡할 일이다. 우선 완주기독교계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김춘배 아버지 김창언 집사는 1907년 가을 자기 집 사랑방에서 사숙 영흥학교(永興學校:1909년 교명 영신으로 바꿈)를 열어 재무를 맡았고 이 학교가 삼례중앙초등학교 아닌가? ‘금강산구경도 식후경속담대로라면 배 이만큼 부르고, 구경도 해외를 포함 어지간치 다녔으니 옛 신문을 뒤적이며 남 얘기에도 귀 기울여 애국지사 무기수의 행적을 살펴보기 바란다. 고산현 옥터를 넌덜막이라한다. 기억하기 싫다는 말이다. 지금 민주국가지만 경찰서 검찰청 교도소 갈만한 곳 아니다. 김춘배 체포-취조-재판 과정을 상상해보자. 완주 부군수와 3국장은 김춘배를 살펴보기 바란다. 이게 선정이다. 삼례제일교회 당회원과 삼례기관 단체 및 선출 직원에게 애향정신이 되돌아오기 바란다. “1918224일 본교회(本敎會) 김계홍(金桂弘) 장로 5형제 권속 30여 인과, 이창옥(李昌玉)집사, 반기춘(潘基春박대필(朴大必) 씨 등 전 가족 50여 인이 중국 동북지방 길림성(吉林城) 연길현(延吉縣)으로 이거(移居)케 되니 교회가 거의 떠난 셈 그중 입교인(入敎人)29 인인고로 교회는 영산(零散)한 중이다삼례제일교회역사열다섯 번째 글 이민편(移民編)기록이다. 김계홍(18691942) 동생이 김창언. 창언 아들이 춘배. 김춘배는 1909년 삼례 태생 參禮 사람이다.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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