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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철의 완주이야기 25] 꽃이 좋아 춘산리(春山里)냐? 2016-07-04

[이승철의 완주이야기 25] 꽃이 좋아 춘산리(春山里)냐?

화산면 춘산리.


 


“얏! 죽지 않으려면 모두 나왓!”


겁에 질린 남녀노소 살기 위에 냇가 가갈 밭에 모였을 때 탕탕탕 총소리와 함께 마을 전체가 불길에 휩싸였다. 금방 먹을 것 입을 것 그날 밤 잠자리를 죄다 잃었다. 70여 호 대촌이 금방 불바다가 됐다.


 


50년이 지난 2000년대 노무현 대통령께 올린 진정서 ▲첫째,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어 간 가족과 생존자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 ▲둘째, 그때 그 일을 계획하고 시행한 자와 직접 행동한 자는 정중히 사과 할 것 ▲셋째, 이로 인해 입은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피해를 정부는 보상할 것.


 


무려 7페이지나 되는 긴 진성서(본문 필자 소장)를 냈는데 결과는 아직 모르겠다. 이처럼 큰 피해를 입은 주민들이 다시 모여들어 구들장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잘 뭉쳐 체육대회에서 우승하며 퇴비증산, 피살이, 수득세 납부 등 정부시책에 순응하는 모범부락이었다.


지게에 감과 땔감을 지고 논산·마산 장에 나가 팔면서도 분교장을 열었고 초등학교를 세워 애들을 가르친 억척스러운 민초들은 그래도 의리가 넘쳐 모정 곁에 최영두 5대국회의원 공적비를 세웠다. 앞산 길가에 효자 김한배 정려가 있는데 여기 김씨는 어버이 기일에 등불을 들고 묘소에 나가 넋을 모셔오며 제사 마치면 모셔다드리는 독특한 효행이었다.


지나던 나그네 “…초여름 밤하늘에 수놓은 별빛처럼 묘묘한 효심이여…”이렇게 읊었다. 2015년 여름 김종준 씨 처상하자 동네 사람들이 상여를 메어 장사지냈고 종준 씨는 청장년들에게 “제발 몸 관리 좀 잘하라!” 신신 당부한다.


“뙤약볕 아래 뻘뻘 땀 흘리며 보리 베던 자기는 어정어정 놀던 000 건강보다 못하다”는 증언이다. ‘까치말’ 주민은 일찍 떠나 폐촌이 되었고 ‘여수개’는 그 이름이 듣지 싫어 ‘예곡’이라 고쳐 부른다. 큰 마을이 ‘덕동(德洞)’인데 원이름은 ‘덕골’, 덕골은 “터 골”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 형성과정이 연구대상이다. 종교박해가 심하던 시절 화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와 ‘터’를 잡아 안전하니 ‘천지신명의 덕’이라 여기며 이 ‘터’에서 잘 되기를 빌었을 것이다. 이 ‘터 골’이 ‘덕골’로 ‘덕골’이 ‘덕곡’으로’, ‘덕곡’이 ‘덕동’이더니 1935년 행정구역을 크게 바뀌며 면(面)은 ‘화산(華山)’ 마을은 좋은 뜻의 ‘춘산리(春山里)’라 부르기 시작했다. 마침 2000년대 고산면 소향리 출신 (주)가람조경 허홍석(063-243-9993) 대표가 예곡 앞 험산을 개발하여 꽃을 심으니 봄이면 만화방창 자연스레 꽃동산이 되어 ‘춘산’은 그 이름대로 화려강산이 완연하다.


 


‘으뜸 고장’ 완주의 명예를 여전히 지켜나간다. 자고 일어서면 이마 닿던 앞산 재가 깎여 자동차가 거뜬히 넘나들며 만목재 넘어 몇 10분이면 논산시내에 이른다. 하나 아쉬움이라면 새마을사업을 하던 시절 보잘 것이 없다며 탑(塔)을 헐어 냈다는데 이는 문화 인식이 부족한 데서 온 실수이다. 한 때 김 씨·배 씨가 많이 살았다. ‘뒤터골’ 묵밭들은 뉘 땅이며 무슨 잡꽃이 만발했을까. 아름다운 춘산을 찾아 종달새와 아지랑이를 보러 가세나. 경로당 방문하면 포근한 인심이 후한 덕을 베푼다. 겨울철 귀를 때어 갈듯 불어 내리던 북풍한설이 아! 이제는 시내 버스가 다니니 걱정 없구나.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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