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행을 다녀온 것도 아니고,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독이 풀리지 않은 느낌이다. 고산권벼농사두레(벼두레)의 1박 2일 백중놀이 뒤끝이다. 김매기를 비롯해 고된 벼농사가 얼추 마무리되는 7월 중하순이 되면 해마다 ‘양력백중놀이’라는 이름으로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해왔다.
보통은 물가나 계곡의 음식점을 찾아 백숙 같은 보양식을 함께 먹고 짧은 물놀이로 더위를 식히는 정도였다. 그런데 올해는 ‘캠핑 축제’로 판이 확 커졌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 아래, 풀벌레 소리 들으며 한여름 밤의 추억을 만들어보자는 게 준비팀이 내건 기획취지. 그래서 란다.
하지만 이 삼복더위에, 그것도 섭씨 40도를 훌쩍 넘는 역대 최고기온을 갈아치우고 보름 넘게 열대야가 이어지는 극한폭염 속에? 한편으론 이해되는 구석이 없지 않았다. 행사가 열리는 동상계곡은 소문난 두메산골.
인근지역과 견줘 기온이 3~4도 낮을뿐더러 밤에는 긴팔 옷을 입어야 할 만큼 선선하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어쨌거나 다섯 시가 되어가자 그렇게 ‘낚인’ 마흔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들을 맞이 한 건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
아무리 동상계곡이라도 37도를 넘긴 폭염을 어쩌지 못한 것이다. 여기저기 틀어 둔 대형 선풍기, 사람들은 그 앞에서 더운 바람을 맞으며 절절매야 했다. 해가 저물어 사위가 어둑어둑해지자 그 더위 속에 모닥불(캠프파이어)에 불이 붙고, 커다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 열기에 더위가 흠칫 물러선 것일까. 사람들의 눈빛도 반짝이기 시작했다. 여기에 알전구 줄조명에 미러볼과 사이키 조명까지 현란한 빛잔치까지 더해 열기가 후끈 달아올라 캠핑장은 거대한 춤판으로 돌변했다. 이것을 이열치열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그 얼얼한 분위기에 사람들은 더위를 까맣게 잊은 모습이었다.
사그라진 모닥불 따라 춤판도 시들해지자 이번엔 ‘가족오락관’을 본뜬 오락프로그램이 이어졌다. 스무고개로 사람 이름을 맞추고, 몸짓 표현만으로 표어를 맞추는 그 뻔한 놀이에도 사람들은 재밌어 죽는다.
한껏 달아올랐던 흥이 제풀에 사그라질 즈음 유명한 라디오 음악프로그램을 패러디한 ‘보이는 라디오’가 뒤를 이었다. 한결 느긋해진 사람들은 삼삼오오 둘러앉거나 주최 측이 급히 가설한 ‘미니바’에 자리를 잡고 얘기꽃을 피웠다. 물론 처음부터 바에 죽치고 앉은 ‘죽돌이’도 없지 않았다.
자정이 넘어가면서 더위에 지치고, 흥에 지치고, 술기운에 지친 사람들이 하나둘 텐트 안에 몸을 뉘였다. 이 와중에도 진지한 표정으로 빙 둘러앉은 여남은 명이 있었다. ‘성노동’이라는 간단치 않은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이던 것이다.
토론 열기는 쉬 식지 않아 새벽 네 시가 가까워서야 어쩔 수 없이 마무리되었다. 이튿날 아침은 물놀이 시간. 함께 따라온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곡물에 신이 났다. 어른들도 참지 못하고 풍덩. 무더위 탓에 그리 시원한 느낌은 없지만 물이면 감지덕지. 더위란 이렇게 이기는 모양이다.
누구는 ‘입추 매직’이라고 하더라만 나는 암만해도 이 이틀 동안의 ‘푸닥거리’ 덕분이지 싶다. 그다음 날부터 폭염이 한풀 꺾인 걸 두고 하는 얘기다. 여전히 30도를 훌쩍 웃도는 날씨지만, 이 정도만 해도 살 것같은 ‘기후위기 시대’ 아닌가.
/비봉 염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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