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이면 원기리 비석 돌에 이름 새겨 오래 전해지는 사람 있는데 , 구이면 원기리 농업협동조합 ( 조합장 안광욱 ) 옆 비석 두 개는 아주 대조적이다 . 비석 세운 주민들이 대단했다 . 이것은 ‘ 구이정신 ’ 으로 봐야한다 .
1989 년 ( 석구 · 원당 · 중인 · 용복 ) 좋은 들판을 전주시에 내주고 , 89.08 ㎢ 남았지만 정신은 언제나 꼿꼿하다 . 120 여년 전 어르신들은 어려운 살림에도 왜 비석을 세웠을까 ? 지금 사람들과 다르다 .
‘ 훌륭한 인물 그 공적 알아주고 ’ ‘ 포악한 자 잊지 말자 ’ 는 강렬한 의지를 들어냈다고 봐야한다 . 판관박후 제근 애민선정비 ( 判官朴侯 齊近 愛民善政碑 : 가로 46, 두께 22, 높이 123cm) 는 인정이 넘쳐난다 .
‘ 전주 판관 (1877) 박제근 (1819 ∼ 1885) 은 백성 사랑했고 선정을 베풀었다 .’ 는 높은 치적과 선량한 백성들의 본심이 새겨졌다 .
선정내용은 보이지 않으나 “ 인품이 근엄하여 공사를 분명히 함으로써 , 가는 곳마다 선한 정치를 했으며 , 이조참판에 증직되었고 , 시문집 『 경암유고 ( 敬菴遺稿 ) 』 가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 우러러 볼만한 인물이었다 .
균전사 김공창석 영세불망비 ( 均田使金公昌錫永世不忘碑 : 가로 46, 두께 22, 높이 130cm) 의 주인공 김창석은 1894 년 동학혁명 전후에 전라도 균전사이었다 . 세금을 조정하고 거두는 관리로 농민들이 벌벌 떠는 사람에 속한다 . 기업인들 가장 두려운 게 세무조사 아닌가 .
김창석은 역사에 어둔 기록을 남겼다 . 동학농민혁명을 불러들인 고부군수 조병갑 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 이 말은 백성을 괴롭혔다는 말이다 . 몇 마디를 소개하면 “ … 전 ( 前 ) 균전사 김창석이 백지징세 ( 白地徵稅 ) 를 한 것 . ” 즉 농사짓지 않은 땅에 세금을 매기었다는 말이다 .
이런 자 그냥 놔둬선 아니 되었다 . 결국 균전사 김창석 ( 金昌錫 ) 균전 잘못 조사한 죄로 충청도 홍주목 ( 洪州牧 ) 에 귀양 갔다 . ‘ 못된 여석 영원히 잊지 말자 .’ 는 억센 구이정신이 담긴 비석으로 보인다 . 왜 소중한가 . 변교사 ( 反面敎師 ) 가 되기 때문이다 .
간접 효과도 컸다 . “ 백성 괴롭히면 언제나 누구든지 ‘ 이 꼴 ’ 된다 .” 는 경고성 구조물이다 . 지금 성난 국민들이 드는 촛불과 팻말이 문제 아니다 . 포학한 자 그 이름을 돌에 새겨 정의사회의 초석으로 삼았다 .
이래서 하는 말인데 완주군청 들어서면 너른 공간 여기에 ‘ 청백리 육대춘 ( 陸大春 ) 흉상 ’ 을 세워 공무원 군민 함께 보며 으뜸 도시의 새 정신 표상으로 삼았으면 한다 . 생화와 조화 다름은 생명력 때문이다 . 돌의 질 , 글씨 , 보존상태 , 이웃집 얘기는 다음으로 미룬다 .
이제부터 구이 면민은 이 비석을 당당하게 내세워도 마땅하고 , 누구나 일 잘하면 비 세워주는 열성이 식지 말아야 하며 , 균전사 비석은 동학농민혁명과 관련 있다고 봐야한다 . 송이목 면장은 통찰력 · 추진력을 발휘하여 비석을 더 좋은 자리로 옮기면 이 자체가 치적이다 .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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