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만리와 회안대군 ( 懷安大君 ) 우리 국민은 흥도 있지만 한 많은 민족이다 . 노인마다 ‘ 내 얘기 책으로 엮으면 한 권 되고도 남지 .’ 고생을 하도 해 ‘ 한 ’ 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 봉동읍 구만리는 완주에서 가장 한 많은 마을이다 .
조선 초 회안대군 (1364 ∼ 1420) 이 태조 (1335 ∼ 1408) 4 남임을 다 안다 . 아우 정안대군 (1367 ∼ 1422: 태종 ) 에 밀려 귀양생활을 오래 한 사실도 잘 아는 얘기다 .
여기 구만리 천내 ( 川內 ) 가 바로 회안대군 만년의 삶터였으며 , 최양 (1351 ∼ 1424) 도 별세한 마을이다 . 고려 말 조선 초를 들썩하게 한 영웅 (?) 두 분이 4 년 사이에 가셨다 .
△ 회안대군의 20 년 귀양살이 토산 - 안산 - 익주 ( 익산 )- 순천 - 익주 - 전주 등등 여러 곳에서 어렵게 지냈다 . 함경도에서 낳아 충청도 은진에서 죽어 전주 법사산 ( 금상리 ) 에 묻혔는데 생시 천렵도 어려웠고 나들이와 사람 만남이 힘들었다 .
감농 ( 監農 ) 을 했다하니 한정된 민초들이 대화 상대일 뿐이었다 . 태조 돌아가셨어도 죄인 (?) 이라는 멍에 때문에 가지 못했고 민씨 처음 부인 젊어서 작고하자 박씨와 혼인하니 시비가 따랐으며 , 또 황씨 금씨와 혼인했으니 처복마저 없었지만 인정 넘치는 흔적이 있다 .
봉동 생강을 아우 태종에게 보냈고 , 이에 앞서 차부원 ( 두문동 72 인 ) 이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만 놀라 타고 갔던 말 대신 소를 타고 와 호가 망우당 ( 忘牛堂 ) 이란다 .
△ 최양은 이 태조와 가까운 사이 전주 땅 800 결 ( 結 :22 만 2 천평 /732,600 ㎡ ) 을 준다 해도 거절했다 . 정몽주가 외삼촌인데 이를 받았다면 그 꼴이 무엇이겠나 . 아마 후손 전주최씨는 고개 들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 그의 묘는 소양면 대승리에 있다 .
이리하여 완주 전주는 의리의 고장이다 . 이를 입증하는 이름이 많다 . ‘ 마그내 ( 막은내 )’ 를 한자로 “ 막근천 ( 莫近川 )” 이라 쓸 수도 있다 . 이 말은 ‘ 가까이 하지마라 ’ 의 뜻이다 . 즉 ‘ 막았다 ’ 는 말이다 . 회안대군의 활동을 ‘ 제한 한 내 ’ 라는 풀이도 가능하다 .
마을 사람들은 ‘ 구만리 ( 九萬里 ) 장천 ( 長天 )’ 에 이를 회안대군의 한을 알았고 , ‘ 구만리 장천 ’ 에 가 임금 되라 빌었을 것이다 . 이래서 이름이 구만리 ( 九萬里 ) 라더냐 ? 완주군 신청사에서 800m 안팎 바로 이웃이다 .
완주군청은 이런 한을 풀어 주려고 가까이 이사 왔다고 말하면 전주최씨 전주이씨 고마워 감읍할 것이다 . 두 성씨는 조선 초기의 『 왕조실록 』 을 읽지 말아야 한다 . 알아 좋은 것도 있지만 몰라야 약되는 게 더 많다 . 원한은 잊어버려야 한다 .
원래 지명은 ‘ 궁만리 ( 弓灣里 )’ 라 했다니 움푹한 지형임을 알 수 있다 . 옴폭한 데는 숨기도 좋지만 가둬 놓기도 편리하다 . 내안 [ 川內 ] 움푹한 곳 구만리를 기억하라 . 봉강서원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다 . /이승철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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