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지나는 술, 과하주(過夏酒) 아침 매미 소리가 상쾌해지고 , 나무 그늘이 깊어졌다 . 한낮의 뜨거운 열기도 저녁 바람에 식혀지니 이제 좀 살 것 같다 .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도 이제 끝자락이다 .
아침나절부터 쪄대는 더위를 피해 어스름 새벽과 저녁 시간을 틈타 게릴라처럼 농사를 지어야 했던 노모는 해마다 마주하는 여름이 처음인 듯 힘겹다고 했다 . 여름은 술 빚기도 힘든 계절이다 .
잡균이 많아진 습한 날씨에 술을 안전하게 발효시키기도 , 최소 한 달 이상 술독을 23 도 이하로 낮춰 숙성시키기도 어려운 문제이다 . 마땅한 저장 기술이나 시설이 없던 옛 조상들은 어떻게 술을 빚고 보관했을까 . 초봄에 빚어놓은 좋은 술도 금세 시어져 식초가 되어버릴 텐데 말이다 .
과하주라는 이름을 가진 술이 있다 . 여름이 지나도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겠으나 술이 여름을 지난다니 소리 내어 부를 때마다 시적인 느낌이 든다 .
『 음식디미방 (1670)] 』 이라는 조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과하주는 술을 빚어 발효가 진행 중인 술독에 알코올 도수가 높은 소주를 부어 빚는 기법의 술이다 . 청주 , 탁주 , 막걸리와 같은 발효주는 낮은 알코올 도수에서 더운 여름에 변질되기 쉽다 .
찹쌀과 누룩으로 술을 빚어 술이 끓어오르는 3~4 일째에 증류주인 소주를 술독에 붓는다 . 술덧 ( 술독에 발효 중인 고두밥 , 누룩 , 물의 혼합물 ) 에 높은 알코올 도수의 소주가 퍼지면 효모가 죽거나 생육하기 힘든 환경에서 발효가 중지된다 .
술덧 속에는 효모가 마저 먹지 못한 당분이 남아 술맛은 달고 , 도수 높은 소주로 인해 과하주는 발효주이면서도 알코올 도수는 20 도 이상을 유지해 여름철에도 마실 수 있게 된다 .
과하주는 효모라는 자연의 미생물이 만들어낸 발효주와 인간의 기술로 만들어낸 증류주가 만나 탄생한 혼양주 ( 混釀酒 ) 기법의 술이다 . 양조 역사에서 유레카를 외쳐도 될 법한 이 신묘한 기법이 1670 년 기록에 등장했으니 실제 민가에서는 1600 년대 초에도 이미 사용되던 양조법이라 추측된다 .
17 세기 말 영국은 프랑스와의 와인 무역이 금지되자 새로운 와인 무역지로 포르투칼을 찾아냈다 .
대서양을 오가는 긴 항해 중에 와인의 변질을 막기 위해 브랜디 ( 와인을 증류한 술 ) 를 일부 첨가하면서 ‘ 포트와인 (Port Wine)’ 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주정강화 와인이 유래되었다 하니 과하주 제조법은 서양보다 백 년을 앞선 양조기술인 셈이다 .
술을 빚는 이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술이 무엇이었는지 묻곤 하는데 , 대개 과하주를 으뜸으로 꼽는다 . 잘 빚어진 과하주를 맛보았을 때 우리 술이 이렇게 기품있고 고급스러울 수 있는지 충격적이었다는 이도 있었다 . 소주가 발효 중인 곡주 속에 스며들어 독한 맛은 부드러워지고 과일이나 꽃 향은 배가된다 .
당이 많이 남아 달기만 한 술은 무겁고 끈적거리는 뒷맛을 남기지만 잘 빚어낸 과하주는 상큼한 단맛과 꽃 향이 입안 가득 퍼지면서 부드러워진 소주가 뒷맛을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
발효주를 잘 빚어야 하고 , 소주를 다루는 기술 , 즉 증류기술도 갖춰야 하기에 가양주인에게 좋은 과하주를 빚는다는 것은 최고 수준의 술 빚는 경지에 올랐음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 이토록 아름다운 술맛을 지닌 과하주는 조상들이 물려준 귀중한 문화자원이다 .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조건을 가진 우리나라에서 여름이라는 힘겨운 계절이 선사한 선물이기도 하다 . 덥고 습한 여름이 있었기에 누군가는 익어가는 술독에 독한 소주를 부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여름을 나는 술을 얻지 않았겠는가 .
과하주 한 잔을 앞에 두고 지구상의 모든 생명들이 갈수록 혹독해지는 여름을 견뎌낼 힘을 어디선가 찾아내길 기원해 본다 . / 유송이 는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양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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