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시울은 곱기도 한 건반밥 고성가도 ( 固城街道 ) 백 석 고성장 가는 길 해는 둥둥 높고 개 하나 얼린하지 않는 마을은 해밝은 마당귀에 맷방석 하나 빨갛고 노랗고 눈이 시울은 곱기도 한 * 건반밥 아 진달래 개나리 한참 퓌였구나 가까이 잔치가 있어서 곱디고흔 건반밥을 말리우는 마을은 얼마나 즐거운 마을인가 어쩐지 당홍치마 노란 저고리 입은 새악시들이 웃고 살을 것만 같은 마을이다 * 건반밥 : 약밥 , 인절미 또는 술을 빚기 위해 찹쌀이나 멥쌀을 물에 불려 시루에 찐 고두밥 , 지에밥이라고도 함 시인 백석 ( 白石 , 1912~1996) 은 마음에 둔 한 여인이 사는 통영에 가던 길에 고성의 어느 마을을 지나며 이 시를 썼다 .
지금으로부터 약 90 년 전의 마을 풍경이다 . 고성장 가는 길에 개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는 조용한 마을에서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어느 집 마당 귀퉁이에 밝은 햇빛을 받아 눈이 시리게 고운 흰 고두밥이 널려 있다 .
잔치에 쓸 꽃술을 빚으려는지 시루에 쪄낸 새하얀 고두밥에 개나리 , 진달래가 뿌려져 있었나 보다 . 널찍한 멍석 위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고두밥에 울긋불긋 봄꽃이 뿌려진 풍경은 얼마나 풍요로운가 .
작년 가을에 거둔 곡식은 이미 떨어지고 풀뿌리 죽을 끓여 끼니를 때워야 하는 보릿고개를 넘어가는 식민지 시대의 봄날 , 멍석에 널린 소복한 쌀밥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멈춰서 하염없이 바라보았을 풍경이다 .
즐거운 잔치를 앞둔 그 마을에는 당홍치마에 노란 저고리를 입은 새악시들이 깔깔거리며 마냥 웃고 살 것만 같은 넉넉한 여유를 느끼며 시인은 불원천리 찾아온 남도에서 만나기를 고대하는 한 여인을 동시에 떠올렸을 것이다 .
술을 빚기 위해 고두밥을 쪄서 넓은 발에 천을 깔고 펼쳐 놓으면 방안은 온통 구수한 냄새가 진동한다 . 쌀을 주식으로 먹는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밥의 냄새다 . 뜨거운 증기로 쪄낸 밥알은 쌀의 형태를 잃지 않고 알알이 살아있다 .
투명하게 익어 번들번들 윤이 나는 밥을 주걱으로 펼칠 때 나는 미안함과 두려움이 동시에 엄습한다 .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지 않고 유사 이래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사는 나는 술을 빚기 위해 아무런 걱정 없이 쌀 1 말로 고두밥을 찔 수 있다 .
섬마을 처녀들은 태어나서 시집갈 때까지 쌀 1 말도 못 먹는다는 과거 세대의 고생을 알지 못하며 , 우리 세대가 소진하고 있는 지나친 풍요로 인해 미래 세대에게 이 같은 풍요를 물려주지 못하리라는 걱정 때문이다 .
꽃들은 순서도 없이 화들짝 피는데 붕붕거리는 벌떼 소리가 들리지 않는 적막한 봄날에 나는 어느 집 마당에 널린 눈이 시리게 고운 고두밥을 보고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넘쳐나는 즐거운 마을을 상상하는 시인 백석이 그저 부러울 뿐이다 .
/ 유송이 는 전통주를 빚고 즐기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가양주 문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수집하고 있다.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