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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칼럼 · 2025.02.18

농촌별곡

행복한 '농사를 쉬는 기간'

지역과 삶, 문화와 일상에 대한 다양한 필자의 생각을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 공간입니다.

등록 2025.02.18 16:25 조회 2,93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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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농사를 쉬는 기간' 이번 겨울은 눈이 참 많이도 내린다 . 자주 내리기도 하거니와 그때마다 펑펑 쏟아져 설국을 만들어 놓는다 . 발코니의 네모난 철제 테이블 위에는 어마어마한 백설기가 얹혀 있고 , 그 너머로 펼쳐진 앞산 자락은 단색 수묵화를 담은 거대한 병풍으로 돌변한다 .

지난 설 연휴에 내린 눈은 고산 땅에 살면서 처음 겪은 큰 눈이었다 . 차도로 통하는 진입로에 엄청난 눈이 쌓여 꼼짝없이 갇히고 말았다 . 눈이 그치지 않으니 치워봤자 소용이 없는 상황 . 늦게서야 이웃 네댓이 달라붙어 두 어 시간 치우고서야 겨우 길이 뚫렸다 . 기상용어로는 ‘ 폭설 ’ 이다 .

그 폭설에 여기저기 폭삭 주저앉은 비닐하우스에 견주면 제설작업이란 사실 얘깃거리도 못 되는 일이다 . 그리고 엊그제 또 눈이 제법 내렸다 . 학습효과라고 할까 , 이번엔 차를 미리 도로변에 주차해두어 갇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움직이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 조금 전 뒷산에 다녀오는 길이다 .

오르막과 능선 쪽으로는 아직도 발이 푹푹 빠질 만큼 제법 쌓여 있다 . 아무도 지나지 않은 하얀 오솔길에 첫 발자국을 내는 그 쾌감을 혹시 아시려나 ? 눈을 내리깔고 ‘ 흰 누리 ’ 를 거닐다 보면 이내 사념의 세계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

세간사에 머무는 게 보통이지만 가끔은 출세간의 삼매에 빠져들기도 한다 . 닿을 듯 , 말 듯 궁극의 경지 . 문득 눈 속에 파묻혀 가부좌를 튼 늙은 스님이 붙든 화두는 어찌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 산마루에서 굽어보는 들녘은 온통 은세계다 .

가물가물 눈에 들어오는 가옥 , 아파트 , 가게 , 시설물 ... 하지만 저 눈 속에서도 세상사는 그대로 이어질 테다 . 사람들은 늘 해오던 대로 일상을 바삐 꾸려가겠지 . 문득 그 삶이 ‘ 등이 휠 것 같이 ’ 무거울까 궁금해진다 . 그래 , 한창 농한기를 지나는 농부에게 지금은 그럴 때다 .

큰 눈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고 울안에 갇힌들 무슨 상관이랴 . 밥벌이하러 나설 일도 없거니와 고립이란 외려 번다한 세상사와 거리를 두기에 더없이 좋은 핑계 아니던가 . 서둘러 제설작업 하는 이웃들 틈에 끼어 마지 못해 넉가래 질을 하노라면 송글송글 땀이 맺힌다 .

그 핑계로 대병 청주 뜨끈히 중탕해서 창밖으로 펼쳐진 설경을 안주 삼아 낮술 몇 잔 걸치는 맛은 또 어떻든가 . 이리 뒹굴 , 저리 빈둥 한없이 게을러져도 아무렇지 않은 시절이다 . 눈이 녹아 길이 뚫린다 한들 딱히 나설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펼쳐 든다 .

얼마 전 다녀온 근현대미술 전람회를 떠올리며 설연휴 내내 서양미술사를 다시 훑어본다든가 , 고전읽기 모임에서 채택한 대장편 소설을 파고드는 식이다 .

록음악의 역사를 다룬 책을 읽다가 사이키델릭 밴드를 다룬 뮤지컬영화를 30 년 만에 재상영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느닷없이 번개를 쳤는데 다행히 세 명이나 붙었다 . 전주 도심의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밤이 이슥토록 감상평을 나누다 보니 테이블에 위에 빈 술병이 수북하다 .

숙취 탓에 느지막이 눈을 떠도 그만이다 . 며칠 뒤에는 고전소설 독후감을 나누기로 했는데 비슷한 상황이 펼쳐질 게 뻔하다 . 농한기는 이렇듯 무척 겨르롭게 흘러가고 있다 . 문득문득 ‘ 이리 빈둥거려도 되나 ?’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한다 .

물론 밥벌이 노동에 대한 무의식적 강박이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다 . 그리고 이제 농한기가 차츰 끝나가는 현실이 조바심으로 나타났음이다 . 그래도 내게는 ‘ 농사를 쉬는 기간 ’ 이 아직 두어 달이나 남아 있다 . 행복하다 . / 비봉 염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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