햅쌀밥 잔치 이틀 내리 세찬 바람이 불었다 . 굵은 빗줄기까지 함께 내리쳤다 . 그 바람에 비닐하우스 위에 똬리를 튼 등나무 덩굴이 훌러덩 벗겨져 거꾸로 처박혔다 . 담벼락을 타고 오른 담쟁이 , 얼마 남지 않았던 이파리마저 죄다 떨어져 앙상하게 덩굴만 남았다 . 산과 들녘의 풍경도 사뭇 바뀌었다 .
뒷산 소나무는 솔가리를 우수수 쏟아내고 활엽수는 저마다 마른 잎을 떨궈 오솔길은 다시 바스락거리기 시작했다 . 비바람 그치고 나니 겨울 초입이다 . 최저기온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지는 바람에 보일러에 서둘러 난방유를 채웠다 . 아침에 눈을 뜨면 앞집 지붕에 내린 허연 된서리가 맨 먼저 들어온다 .
호박잎이 눅어 오그라진 지는 벌써 며칠 되었고 , 새빨간 꽃을 꼿꼿이 세웠던 백일홍도 칙칙하게 빛이 바랬다 . 그래도 김장배추는 끄떡없다 . 고라니 등쌀에 겨우 열댓 포기가 살아남았는데 이제야 속이 차오르고 있어 제구실이나 할 수 있을는지 . 해 저무는 산등성이를 물들인 노을이 유난히 붉게 빛난다 .
이게 다 겨울 채비를 서두르라는 신호들이다 . 그러거나 말거나 살림살이가 단출하니 딱히 준비할 건 없을 것 같고 . 가을걷이 하느라 종종거릴 땐 눈코 뜰 새가 없었는데 , 일 다 끝내고 첫 방아 찧어 밀려든 직거래 쌀 보내놓고 나니 갑자기 널널해진 하루가 낯설기만 하다 .
하릴없이 빈둥대다가 어제는 미디어센터에서 틀어주는 영화 ‘n 차 관람 ’ 하고 , 오늘은 새로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보고 . 이 사람과 점심 먹고 , 저 사람과 술잔 기울이는 날들 . 물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 잠깐의 ‘ 조정기간 ’ 일 뿐이다 .
머잖아 이 겨르로운 농한기 질서도 자리를 잡아갈 것이다 . 그리고 이런저런 핑계로 제법 바빠질 것이다 . 이를테면 ‘ 햅쌀밥 잔치 ’ 같은 것 . 첫 방아 찧고 나서 어김없이 잔치판을 벌였다 . 헤아려보니 어느덧 6 년째 . 뭐 , 중뿔날 것도 없다 .
그저 갓 거둬들인 햅쌀로 지은 밥을 함께 나누는 거다 . 그 사이 코로나 팬데믹에 뜻하지 않은 국가적 참사 속에서도 한 해 농사를 갈무리하는 뜻깊은 자리이니 건너뛸 수가 있겠는가 . 오로지 햅쌀밥의 힘으로 펼쳐지는 잔치 . 왜 햅쌀밥인가 . 깔과 향 , 맛에서 묵은 쌀밥과 견줄 바가 아니다 .
기름이 자르르 윤기가 도니 눈맛부터 다르다 . 한 술 떠 넣으면 입안 가득 퍼지는 , 형언할 수 없는 그윽한 향 . 황홀함에 잠깐 동안 아득해지는 느낌 . 씹으면 이내 “ 살살 녹는다 ” 거나 “ 혀에 착착 감긴다 ”. 구수한 듯도 하고 , 감칠맛이 돌기도 한다 .
특히 < 참동진 > 품종은 쌀알이 굵어 식감이 탱글탱글 . 오죽하면 반찬 없이도 한 사발 뚝딱 해치운다고 했던가 . 이번에도 밥이 모자라 두 번 , 세 번 밥을 지어내느라 허둥거려야 했다 . 이렇듯 입이 호강하면 저절로 흥이 나는 법일까 .
미리 짜두었거나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럼없이 나서 노래 한 자락 뽑아내는 이가 있다 .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분위가 후끈 달아오른다 . 그 틈을 놓칠세라 누군가 휴대용 노래방기기를 꺼내 온다 . 이어지는 ‘ 광란의 밤 ’. 그날 어떤 정경이 펼쳐졌는지는 이쯤에서 접어두기로 하자 .
다만 밤이 이슥해 자리를 뜨는 표정들이 몹시 아쉬워 보였다는 거 . 사실 낯익은 풍경이다 . 올해 농한기도 이렇게 시작됐다 . 더 많은 핑계로 더 많은 잔치판이 펼쳐질 것이다 . 이제 그것을 모의하는 회의자리로 향할 시간이다 . / 차남호 (비봉 염암마을에 사는 귀농인)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