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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칼럼 · 2025.05.22

농촌별곡

농사보다 OO

지역과 삶, 문화와 일상에 대한 다양한 필자의 생각을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 공간입니다.

등록 2025.05.22 09:19 조회 2,18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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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보다 OO 풀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 나무꽃이 봄 들녘 허리를 눈부시게 수놓았다면 지금은 풀꽃이다 . 초여름으로 접어들었다는 얘기 . 잔디밭 가장자리 , 마당 언저리에 나지막이 피어나는 수레국화 , 데이지 , 꽃양귀비 , 금계국 ... 길섶에는 이제 간드러진 풍경이 펼쳐지겠지 .

농사철로 들어섰건만 농사꾼은 꽃 타령에 넋이 나갔다 . 그도 그럴 것이 지난가을부터 꽃씨 뿌리고 , 모종 옮겨심으며 싹이 텄나 , 뿌리를 내렸나 애를 태워왔더랬다 . 겨울을 나고 날이 풀려 쑥쑥 올라온 꽃자루마다 망우리가 맺혔다 . 얼마나 기특하던지 .

그런데 그리 애지중지하던 꽃줄기가 짓눌리고 말았다 . 볍씨를 담그던 날 , 염수선 ( 소금물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일 ) 작업에 열중하던 이들이 무심결에 꽃 무더기를 밟고 지나간 것 . 그것도 몇 차례나 . 그때마다 내 몸뚱이가 짓밟히는 듯 가슴이 움찔움찔하는 거다 .

이러다간 죄다 결딴나겠다 싶어 잠시 작업을 멈추고 주의신호를 보내야 했다 . 이거 좀 예민한 거 아니냐고 ? 실제로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가 더러 있었다 . 벼농사 짓는 농부라면 ‘ 꽃보다 볍씨 ’ 아니냐고 . 물론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다 . 그러나 단언컨대 그 순간 볍씨는 안중에도 없었다 .

그래 , 볍씨보다 꽃이 더 중하다면 농사꾼인가 , 한량이거나 원예가인가 . 나는 정녕 무엇인가 . 안 그래도 스스로 의아스럽던 참이다 . 일단 벼농사만 짓는 농부다 . 벼농사 작기는 반년 (5 월 ~10 월 ) 이니 가을부터 봄까지 나머지 반년은 농한기인 셈이다 .

농사철이라 해도 모내기와 가을걷이 같은 농번기를 빼고는 한갓진 편이다 . 결국 “ 농사보다 OO” 이 나를 규정짓는 셈이다 . 이른바 ‘ 반농반 X’ 를 넘어서는 그 무엇 .

얼마 전 한 술자리에서 “ 따지고 보면 출가를 한 셈이고 , 그렇다면 ‘ 사문 ’ 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 고 했더니 다들 손뼉을 치며 그렇다고 하는 것이다 . 왜 아니 그렇겠나 .

추워지면 ‘ 동안거 ’ 에 들어 문을 닫아걸고 , 한여름 폭염에는 논배미야 어찌 됐든 ‘ 하안거 ’ 인 듯 납작 엎드려 있으니 말이다 . 그 안에서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쨌든 추위와 더위 속에 수행이라면 수행이겠다 .

이렇게 보면 농사꾼인지 , 한량인지 , 사문인지 , 또 다른 무엇인지 아니면 그 모두인지 스스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 그래도 이 순간 분명한 것은 농사철이 되어 나는 다시 벼농사를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 그 점에서 나는 농사꾼인 게 틀림없다 .

이미 꽃줄기가 짓밟히는 아픔 속에 볍씨를 담그고 촉을 틔워 모판에 파종하고 싹을 올려 못자리에 앉혔다 .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4 월말부터 5 월초에 걸쳐 고산권벼농사두레 두레작업으로 해치웠다 . 지금은 볏모가 못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상태다 .

그런데 올해는 상황이 크게 바뀌었다 . 그러께부터 벼두레 경작면적이 크게 늘어나는 바람에 두레작업에 과부하가 걸렸더랬다 . 고심 끝에 벼두레 공동경작지에서 우리 논배미 대부분을 제외한 것이다 . 그에 따라 벼두레 차원의 전체 경작면적은 절반 가까이 줄었다 .

당연히 두레작업에 드는 노동력과 여러 부담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 하여 올해 두레작업은 더 느긋하면서도 여느 해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 제행무상 ( 諸行無常 ) 이니 , 생주이멸 ( 生住異滅 ) 이니 들먹일 것도 없이 세상일이란 본시 덧없는 법이다 . 그러니 찰라 뒤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

/ 비봉 염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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