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향배보다 소중한 가치 새해가 되었다 . 을사년 , ‘ 푸른 뱀의 해 ’ 라고 , 지혜를 상징한다고 , 잘 계획하고 실행하면 풍요를 얻을 수 있다는 얘기도 더러 있지만 아무래도 국권을 잃은 을사조약 (1905 년 ) 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
더욱이 계엄선포에 이은 내란사태에다 제주항공 참사까지 겹쳐 그야말로 ‘ 을씨년스러운 ’ 나날이 이어지는 시절이다 . 상황은 너무도 뚜렷하고 나아갈 길 또한 자명하건만 ‘ 정략 ’ 에 휘둘린 시국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뿌옇게 흐려진 형국이다 .
하긴 세상일이란 게 죄다 내맘처럼 돌아갈 수만은 없는 노릇이겠다 . 그래도 ‘ 사필귀정 ’ 이라 하지 않았던가 . 때로는 헛다리를 짚고 엇박자로 헤매다가도 결국은 제 길을 찾아가게 돼 있다는 얘기다 . 그리될 거라고 본다 . 설령 그리되지 않는다해도 어쩌란 말인가 .
시간이 더 필요하고 더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어쨌거나 제왕적 권력을 거머쥔 한 사람의 독단이 부른 망동으로 숱한 이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 .
민주사회의 시민이라는 자부심이 처참히 무너진 건 물론이고 , 온갖 경제지표가 곤두박질치고 너도나도 장사가 안 된다고 아우성이다 . 나 또한 그 피해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어수선한 시국이 이어지면서 한동안 쌀 주문이 뚝 끊긴 것이다 .
“ 쌀이 안 팔리면 남은 쌀 먹고 살면 되지 ” 씁쓸한 농담 뒤로 아찔한 생존의 위기를 실감하고 있다 . 이럴 수도 있구나 . 그래도 ‘ 굶어 죽기야 하겠느냐 ’ 는 근거 없는 낙관이 관성적인 삶을 지탱해주고 있다 .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그럭저럭 농한기를 누리고 있는 중이다 .
먼저 다섯 번째를 맞은 ‘ 농한기영화제 ’. 고산권벼농사두레와 완주미디어센터가 함께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 일주일 동안 매일 저녁 한편씩 주로 독립영화를 틀었다 . 이번에는 퀴어 , 미투 , 종군위안부 등 성평등 주제를 다룬 영화가 주로 상영됐다 .
탄핵정국 속에 펼쳐진 광장에서 다양한 의제가 꽃을 피운 상황과 맥을 같이 하는 듯도 하다 . 뜻밖에 적지 않은 관객이 몰렸는데 위로가 필요한 시절임을 보여준 건 아닌가 싶었다 . 한국 근현대미술 작품을 만난 건 특별한 행운이었다 . 전북도립미술관이 마련한 ‘ 이건희 컬렉션 ’ 이 그것 .
정경유착과 무노조경영으로 악명높은 삼성재벌 소유주가 그 재력의 일부를 예술품에 안배해 이번 전시회 부제처럼 ‘ 선물 ’ 을 안기다니 이거야말로 격세지감 아닌가 말이다 . 이중섭 박수근 이응노 김환기 김기창 ... 숱한 거장들의 작품을 친견하는 감동이라니 . 느닷없이 횡재한 기분이랄까 .
아무리 농한기라지만 하루하루를 이렇듯 특별한 감동으로 채울 순 없는 노릇이다 . 육신의 생존을 위해 삼시세끼 챙겨야 하고 , 생각을 정리하고 건강을 돌보기 위해 뒷산을 오르는 일도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다 .
낙엽이 덮인 오솔길에 흰 눈이 쌓이고 짐승의 발자국이 찍힌 그 길을 거니노라면 세간의 번뇌가 무상해지기도 한다 . 그래도 오솔길이 끝나는 곳에서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다시 이어진다 . 하여 우리는 그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 우리 삶에 모범답안 같은 건 없다 . 저마다 살아가는 것이다 .
각자도생 , 제각각 살길을 찾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 당연히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한다 . 힘을 모으되 우리가 마침내 이루고자 하는 지향점을 견지하자는 것이다 . 그것은 사회적 약자의 권익보장 , 기후위기 극복과 생태보전 , 성평등한 사회 같은 것이겠다 .
이야말로 권력의 향배 따위보다 훨씬 소중한 가치가 아닐까 . / 비봉 염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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