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내리 비가 내렸다 .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을 흠씬 적셨을 테니 들녘엔 한껏 물이 올라 싱싱한 기운이 넘쳐흐른다 . 오늘은 마침 겨울잠 자던 개구리 따위 깨어난다는 경칩 , 이젠 꼼짝없이 봄이렷다 . 우수 경칩은 온갖 미물을 깨우지만 , 전통 농경사회 일꾼들도 슬슬 몸을 푸는 절기였다 .
농사철이 코앞에 다가온 것이다 . 하지만 농사준비가 시작되는 건 본디 정월대보름부터다 . 새해를 맞아 ‘ 설설 ’ 삼가다가 보름달 기운이 뻗치고 날이 풀릴 즈음 , 풍년과 건강을 비는 것으로 농사철을 열어젖혔던 것이다 . 정녕 그렇다 .
벌써 보름 전 일이지만 올해 대보름을 생각하면 아직도 흥이 나고 가슴이 뜨거워진다 . 요즘 세상에 대보름은 전통사회의 유물일 뿐이다 . 피붙이끼리 쇠는 설 명절은 지금도 명맥을 잇고 있지만 대보름은 마을공동체의 명절인 탓이다 .
집안 살림에서 농사 비중이 줄어들고 , 그나마 축산 , 시설채소 , 원예 , 특작 따위로 제각각이라 시골에서도 마을잔치는 그리 절실하지가 않은 것이다 . 그러니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고 , 공동체를 살리자면 거꾸로 대보름잔치 만한 게 없다 .
그런 까닭에 지난해 우리 동네 ‘ 청년모임 ’ 이 앞장서 대보름잔치를 꾸렸던 거고 . 올해는 판이 더 커졌다 . 이번엔 벼농사모임이 먼저 나서 놀이판을 짜고 , 마을 청년모임은 작년처럼 소머리국밥을 준비하기로 했다 . 며칠 전부터 여기저기 땔감을 그러모으고 대나무를 베어다가 달집을 세웠다 .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오곡밥을 짓고 , 보름나물을 무치고 , 갖은 먹거리를 마련했다 . 아침부터 부산을 떨어 마을 어르신들께 점심을 대접하면서 잔치가 시작됐다 . 어스름이 깔리자 달집을 세운 마을 앞 논배미로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금세 왁자해졌다 .
현장에서 급조한 풍물패였지만 몇 번 호흡을 맞춘 끝에 왕년가락이 되살아난다 . 덩실덩실 춤판이 벌어지면서 분위기가 확 달아오른다 . 아이들은 불 깡통을 돌리고 불장난을 하느라 신이 났다 . 동녘 하늘에 둥근달이 떠오르면서 소원지를 매달아 둔 달집에 불을 댕겼다 .
엄청난 불길이 하늘로 치솟으며 활활 타오르자 일시에 탄성이 터져 나온다 . 여기저기 두 손을 모으고 소원을 비는 모습도 눈에 띈다 . 다시 풍물가락이 울리고 , 불길을 싸고도는 기다란 행렬의 강강술래가 펼쳐진다 . 저녁나절 시작된 잔치는 밤이 이슥해서야 막을 내렸다 .
달집은 그 사이 모닥불로 잦아들었고 , 잔치끝판이 아쉬운 몇몇이 둘러앉아 민요가락으로 마지막 흥을 돋운다 . 그 모닥불마저 사위어들면서 잔치는 끝났다 . 마을잔치는 더불어 하나 되는 ‘ 어울마당 ’ 이기도 하지만 그 한 사람 한 사람한테는 ‘ 풀이 ’ 이기도 하다 .
한풀이 , 넋풀이 , 신명풀이 ... 돌아보면 지난 가을걷이 이래로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었다 . 농민과 농업을 희생양으로 다루는 살농정책이 분에 겨웠고 , 이 작은 지면 또한 노여움과 하소연으로 넘쳤더랬다 . 지금도 몹쓸 농정은 여전하지만 신명나는 잔치판에서 그나마 맺힌 응어리를 풀 수 있었다 .
조금은 숨통이 트인달까 . 아울러 긴 터널을 지난 듯 마침내 밝고 훈훈한 얘기를 싣게 된 것도 여간 반갑지 않다 . 모쪼록 그 대보름 기운 받아서 모든 시름이 봄눈 녹듯 스러지기를 . /차남호(귀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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