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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앗이칼럼 · 2025.02.18

김영혜의 영화산책

"어떤 일은 모른 척해야 하는 거야"

지역과 삶, 문화와 일상에 대한 다양한 필자의 생각을 차분하게 읽을 수 있는 칼럼 공간입니다.

등록 2025.02.18 16:32 조회 2,95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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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은 모른 척해야 하는 거야" (1) 이처럼 사소한 것들 < Small Things Like These > 어두운 거리에 찬비가 내린다 . 포석이 깔린 경사진 골목길을 따라 빗물이 흐르고 , 골목길 양쪽으로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서 있다 .

그 집들 어디에서도 따듯한 불빛은 새어나오지 않는다 . 춥고 , 축축하고 , 어두운 거리를 벙거지 털모자를 쓴 한 사내가 구부정한 어깨를 한 채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다 . 그래 , 아일랜드가 아닌가 . 주인공 빌 펄롱은 아일랜드의 한 중소도시에서 석탄과 가스를 파는 , 자수성가한 사장님이다 .

영화 포스터 (팀 밀란츠 감독, 킬리언 머피 주연, 2024, 아일랜드)
영화 포스터 (팀 밀란츠 감독, 킬리언 머피 주연, 2024, 아일랜드)

말이 사장님이지 , 우리로 치면 연탄에 해당하는 석탄 , 갈탄 덩어리와 가스통을 인부들이 트럭에 실어주면 그걸 집집마다 직접 배달해주고 연명하는 소규모 자영업자에 불과하다 .

부유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래도 그는 살뜰한 아내와 고등학생에서부터 초등학생에 이르는 네 명의 딸을 두고 작은 집에서나마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 아버지를 모르는 채 농장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미혼모 어머니의 손에서 자란 그는 ‘ 이처럼 사소한 것들 ’ 이 주는 일상의 행복을 소중히 여긴다 .

도시의 모든 것을 은근히 지배하고 있는 수녀원에서 우연히 ‘ 그 일 ’ 을 마주치기 전까지는 . 자신의 출생과 관련된 어린시절의 어두운 기억은 빌 펄롱으로 하여금 수녀원에서 목격한 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들고 , 겨우겨우 이룩한 ‘ 사소한 행복 ’ 으로 이루어진 성을 위태롭게 만든다 .

이를 눈치챈 아내는 기겁을 하며 빌 펄롱이 수녀원장의 심기를 거스리지 못하도록 만류하지만 , 착하고 여린 심성의 소유자 빌은 괴로워한다 .

“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은 모른 척해야 하는 거야 !” 아내가 빌을 만류하며 내뱉은 이 한 마디는 머나먼 아일랜드가 아니라 2025 년 한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가슴을 비수처럼 찌른다 . 너무도 익숙한 , 그러면서도 단박에 거부할 수 없는 이 한 마디의 말 .

사실 우리들의 삶은 지겹도록 사소한 일상을 조금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요소들을 줄타기하듯 요리조리 피하고 , 외면하고 , 타협하는 선택들로 가득차 있지 않은가 . 그러다가 누군가는 과감히 , 또 누군가는 번민 끝에 떨쳐 일어나고 , 또 누군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스스로를 정당화하기도 하지 .

그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삶은 빌 펄롱같이 끝내 떨쳐 일어나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

바라보는 것만으로 너무 즐거운 킬리언 머피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이 이 영화에서도 훌륭하지만 , 수녀원장역을 맡은 에밀리 왓슨 (Emily Watson) 의 연기도 매우 인상깊었다 .

아주 오래 전 어떤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출연한 그녀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었는데 , 예기치 않게 이 영화에서 그녀를 다시 보게 된 것은 덤으로 얻은 즐거움 . 이 영화는 원작이 있다 . 국내에도 얼마 전에 번역되어 나와 있으니 원작을 한 번 찾아보는 것도 좋은 생각일 듯 .

/ 김영혜 는 부산에서 태어나 여기저기 떠돌다가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전주에 이십 년 넘게 정착해 살았다 . 얼마 전 은퇴해서 완주에 작은 땅을 일구며 살고 있다 .

현장 사진

"어떤 일은 모른 척해야 하는 거야"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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