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척박사 임박사의 파란만장 연대기 포털 사이트가 제공하는 어학사전은 ‘ 맨땅에 헤딩 ’ 이라는 말을 ‘ 무모한 일에 도전하거나 , 타인의 도움이나 아는 것 없이 혼자서 일을 어렵게 해나가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
임영배씨 (73 년생 ) 의 인생은 그야말로 ‘ 맨땅에 헤딩 ’ 을 설명하는 가장 훌륭한 예시가 될 수도 있겠다 .
소양면 송광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해야 했던 종이장판 만드는 일을 거드는 것부터 가구공장 목수일 , 슈퍼마켓 유통업 , 덤프트럭 운전 , 횟집 삐끼 , 택배사업 , 통신설비 , 택시기사 , 족발가게 운영 그리고 지금의 편백나무 가구전문 생산업체 ‘ 나무다룸 ’ 의 대표 까지 .
그는 재고 따지고 할 것도 없이 단 한 달의 쉴 틈도 없이 살아왔다 . “ 용진 산정리가 고향인데 초등학교 2 학년 때 소양 송광마을로 이사 갔어요 . 아들만 4 형제 중에 장남이었죠 . 어렸을 때부터 집안일을 도왔는데 , 종이 장판이라고 아세요 ?
그 당시 송광마을 사람들은 거의 다 종이 장판 만들어서 먹고 살았어요 . 한지도 유명했고요 . 새벽 두 시에 부모님들이 일어나서 종이에 풀칠을 해요 . 어렸을 때부터 그 시간에 부모가 일하면 우리가 편히 잘 수가 없잖아요 .
풀도 개어주고 짐도 같이 들어주고 학교 끝나면 집에 가서 , 무나무 ( 물나무 ) 라고 종이를 널어놓을 때 짚어주는 집게가 있어요 . 그걸 동네에서 직접 만드는 분이 계셨어요 . 암튼 우리가 무나무 집게를 뽑으면 부모님은 뒤따라오면서 그 종이를 걷는 일을 했어요 .
5 톤 차로 한지를 몽땅 싣고 와요 . 그럼 그걸 저장해놨다가 얇은 한지를 몇 겹으로 두껍게 풀칠을 하는 거죠 . 한 장을 두 장으로 만들고 겹겹이 계속 붙이는 거죠 . 그 두꺼운 거를 또 방아를 쪄야 해요 . 두꺼우니까 납작하게 눌러주면 힘이 생기고 단단해지지 .
납작해진 걸 콩기름에다 넣어서 말리면 장판이 되는 거예요 . 초등학교 4 학년 때부터 일을 했던 거 같아요 .” 한지로 종이 장판 만드는 일을 했던 송광마을 사람들은 제법 잘 살았다고 한다 . 하지만 임영배씨의 아버지는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고 한다 .
4 형제의 장남이었던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열일곱 어린 나이에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갔다 . 그가 취직한 곳은 세곡동 헌인마을에 있던 스타가구라는 공장이었다 .
공장에 있는 작은 방에서 생활하며 5 년 동안 일을 했고 돈도 제법 모았지만 아는 사람이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는 바람에 모아둔 돈을 모두 잃었다고 한다 . “ 그렇게 회사를 그만두고 부안 격포에 내려가서 친척 누나네 가게 일을 좀 도와줬어요 . 제일상회라는 슈퍼마켓이었어요 .
매형이 간암에 걸려서 힘들어 하실 때 누나 혼자 일하는 게 힘드니까 겸사겸사 내가 도와주러 간 거죠 . 근데 그 당시에 큰 사고가 있었어요 . 위도 페리호 사고가 난 거죠 .
격포에서 가게를 했으니까 위도에 있는 구멍가게로 들어갈 라면이나 술 같은 걸 배에 실어서 보냈는데 갈 때는 잘 갔는데 그 배가 오면서 가라앉았어요 . 나는 그 배에 물건을 실어만 주고 나오긴 했는데 그때 난리였어요 .
그 조그만 동네에 차들이 너무 많이 들어오고 , 사람 건져낸다고 배는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고 , 헬기는 떠다니고 , 무당들은 굿한다고 난리고 아무튼 엄청났어요 . 그때 제 나이가 22 살 때인가 그랬어요 .” 그런 일을 겪고 그는 격포를 나와서 대형면허를 따고 덤프트럭 운전을 7 년 동안 했다 .
장수 번암면에 있는 동아댐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 임막해 ’ 하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 무거운 흙을 싣고 급경사면을 오르내리는 위험한 일을 밥 먹듯이 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 “ 댐 바닥의 흙을 퍼다 나르는 일을 했는데 , 댐 밑바닥에서부터 산꼭대기까지 후진으로 운전해서 올라가야 되요 .
낭떠러지 같은 곳도 아슬아슬하게 운전하기도 하고 . 흙을 부려야 하는 곳이 40 미터 낭떠러지 같은 곳인데 그 끝 제일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서 흙을 쏟아내야 하거든요 . 아마 지금도 트럭으로 후진해서 서울까지 가라고 하면 할 수 있어요 . 덤프트럭 할 때 별명이 임막해였어요 . 무식했던 거죠 .
저렇게 목숨 걸고 무식하게 일하는 사람 없다고 그런 별명이 붙었어요 . 끄터리까지 가서 흙을 부리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어요 . 일을 선택할 때마다 스스로가 개척한 거에요 . 원래는 처음 시작한 일과 연관이 되는 일을 선택하면서 살잖아요 .
근데 저는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게 중요하니까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직업을 바꾸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 그때그때 선택을 해야 했어요 . 중학교만 졸업해서 그런지 주변에 인연들이 없었어요 . 사회에 친구들이 많아야 일이 연결도 되고 도움도 받는데 .
정말 맨땅에 헤딩하듯 살았어요 .” 그는 개인 사정으로 덤프트럭 일을 그만두고 다시 격포로 가서 횟집 일을 시작했다 . 슈퍼마켓을 하던 사촌 누나가 큰 횟집을 열었고 아직 이십 대 후반 어린 나이였던 그는 인연이 닿는 데로 몸을 내맡기며 다시 격포로 온 것이다 .
그러다 택배 사업도 한 4 년 정도 하고 소형선박 자격증을 따서 낚싯배 운행도 했다 . 그렇게 격포에서만 17 년 정도를 살며 청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 “ 그러다 전주로 와서 인테리어 회사를 다녔어요 . 집 , 상가 수리일을 했죠 .
한 7 년 정도 일을 하면서 기술을 배웠고 그 기술로 인해서 지금까지 먹고 살았고 또 이 일도 할 수 있는 거죠 . 주변 사람들이 그래요 . 나랑 김병만 둘을 정글이든 어디든 던져놓으면 어떻게든 먹고 산다고 . 올 8 월이 되면 내가 사업자등록증 낸 지 2 년째가 되요 .
내가 이 회사 인수할 때만 해도 유통회사로 한 달에 제품이 100 개씩 나갔는데 그때 계약했던 유통회사가 빠져나가면서 진짜 힘들었어요 . 그래도 지금은 이 근처 유치원 같은 곳에서 연락 와서 아이들 원탁 , 의자 주문도 하고 리모델링 같은 일도 하죠 .
편백이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좋다고 하니까 요즘 많이 나가요 . 전에는 제작만 했는데 이제는 소매도 하고 그래서 옆에 전시장도 만들어 놓고 그랬죠 . 요즘 제 별명은 맥가이버 혹은 임박사라고 불려요 . 사람들이 뭘 하고 싶다고 말만 하면 제가 다 만들어 내니까 척척박사 임박사라고 하죠 .
내가 힘들어도 주변 사람들이 편해야 내가 편해요 .” 봉동 중리마을에 있는 그의 가구공장이 이제 비빌 언덕이다 . 어려운 코로나 시기도 잘 견뎌냈다 . 공장한쪽에는 낚시장비가 가득해서 이제는 아파트에서는 못 살 것 같다고 한다 .
쉬는 날이나 짬이 날 때마다 즐기는 낚시 덕분에 힘든 시기를 견뎌냈을지도 모르겠다 .
추운 겨울에는 나주에 있는 저수지에서 밤낚시를 하고 2 월 중순까지는 왕궁 구덕저수지에서 , 4 월 초까지는 경천저수지에서 , 5 월까지는 구이저수지에서 이런 식으로 그는 허가된 저수지에 보트를 타고 들어가 밤낚시를 즐긴다 .
아내도 낚시의 손맛을 알아서 그의 낚시 취미에 반대하지 않는다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 그의 인생은 그의 표현처럼 맨땅에 헤딩하듯 누구의 도움도 없이 도전하는 삶의 연속이었다 .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나쁠 것은 없지만 , 이제는 맨땅 말고 꽃과 풀과 나무들이 있는 부드러운 땅 위에 헤딩 말고 천천히 거닐면서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건강하게 그리고 부드럽게 .
/ 글·사진= 장미경 (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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