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살, 백일도 안된 큰 아들을 업고 딱성냥을 팔았던 국인순 씨. 40대 후반에 사업자등록을 하고 양초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인연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삼례 무궁화 양초 국인순 씨 이야기 기계공업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거대생산방식이 주를 이루게 되면서 동네에 적정하게 자리 잡았던 작은 공장들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 삼례 마천 마을에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는 양초공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
이런 곳에 공장이 있을까 하는 곳에 삼십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간판은 없지만 찾아올 사람은 다 찾아오는 곳이다 . 나처럼 초행길에 길을 헤매게 된다면 지나가는 어르신에게 물어보면 된다 . 동네 사람들은 그냥 양초집이라고 부른다 .
무궁화 양초집 사장 , 국인순 (76 세 ) 씨는 이 동네 사람치고 양초 공장에서 일 안 해 본 사람 없다고 한다 . “ 마을에서 놉 얻어서 일 많이 했었지 . 다 한 번씩은 우리 공장 거쳐 갔지 . 특별한 기술 없어도 와서 배워가며 일하면 되니까 . 우리 마을 근처에는 공장이 없었어 .
이 주변에는 다 농사짓는 사람들이었지 .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 틈틈이 일을 했어 . 서로 마을 이웃으로 신용도 있으니까 믿고 일하기 좋잖아요 . 경로당 없을 때는 우리 집이 마을 사랑방이었어 . 나한테 사람들이 잘 붙어 . 늘 내 주변에 더글더글해 .
우리 집 아저씨 있을 때는 남자들이 바글바글했었어 . 내가 술상 다 챙겨주고 그랬어 . 그러니까 동네사람들이 좋다고 우리 집에서 자주 모였지 ” 동네 사람들을 고용해서 함께 일하고 서로 연결되고 살피는 관계망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던 것이다 . 일종의 마을기업 아니었을까 .
국인순씨는 40 평 남짓한 지금의 공장을 특별히 고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 천장 , 벽면과 바닥을 꼼꼼히 살펴보며 무궁화양초의 가내수공업 역사를 되돌아본다 . 켜켜이 쌓이고 쌓인 촛농처럼 국인순씨 가족의 삶과 이 곳에 놀러와 함께 웃고 먹고 마시며 일했던 동네 사람들의 삶이 쌓여 있는 듯하다 .
딱성냥 팔아서 양초공장을 세우다 22 살 때 삼례로 시집 온 국인순씨는 그 해에 첫 아이를 낳고 , 자신의 인생을 걸고 큰 결심을 해야만 했다 . 고향 마을 살던 큰 애기 시절에는 숫기가 없어서 보따리 하나도 못 들고 다녔던 아이였다 .
그렇게 순진했던 22 살의 인순씨는 오로지 살기 위해 길을 나섰다 . 백일도 안 된 아이를 등에 업고서 . 왼쪽부터_ ①양초의 원료인 왁스들이 창고 한 쪽에 쌓여 있다. ②왁스를 솥에 부어 끓이면 액체가 된다.
③액체가 된 왁스 를 양동이에 담아 양초틀에 붓고 2시간 정도 기다리면 단단한 양초가 만들어진다. ④아래 장치를 발로 눌러 틀안에 굳은 양초만 들어올린 후 촛농을 정리한다. ⑤완성된 초는 절단기에 넣고 일정한 크기로 잘라준다. ⑥촛농이 떨어져 작업복과 신발에 눌러 붙었다.
⑦인순 씨가 쓰던 장부 ⑧가장 가느다란 굵기60호짜리 양초기계. 이 굵기의 초는 5분이면 완성된다. “ 시집오니까 아무것도 없어 . 십 원하나 없어 . 신랑이 못 벌면 내가라도 벌어야지 . 우리 아들 백일 때부터 장사를 시작했어 . 무슨 장사를 했냐면 딱성냥을 팔았어 .
벽에 그시면 불이 붙는 성냥이야 . 그 당시 성냥 도매집이 삼례에 있었어 . 논산에 비사표 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물건 떼어다 팔고 그랬지 . 버스타고 전주 , 익산으로 다니면서 물건을 참 잘 팔았어 . 아이 셋 다 업고 다니면서 팔았지 . 아이 낳고 몸 풀 세도 없이 성냥 팔러 다닌 거지 .
그 당시 나 말고 여럿 아줌마가 팔고 다녔는데 내가 제일 오래 남았어 . 참 잘 팔았어 . 가는데 마다 장사를 너무 잘 한다고 , 버스에서 물건 내려놓으면 금세 팔렸지 . 십 원도 없는데 보따리 장사 하면서 돈을 만들었지 .
모은 돈으로 쌀 계 하고 그렇게 목돈을 모아서 공장을 세운거야 .” 국인순씨 40 대 후반에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양초 기계 세 대로 사업을 시작했다 . 자신의 사업을 해 볼 생각을 하게 된 건 동네 사람들의 부추김이었다 .
“ 그 당시 공장 세울 만큼의 돈이 있지는 않았는데 이웃집 사람들이 농협 가서 빚을 얻어줬어 . 장사를 너무 잘하니까 남의 집에서 떼어다 파느니 내 장사를 하라고 . 내가 동네에서 신뢰가 좋았나봐 . 성냥 팔고 애들 셋 키우는 과정을 동네 이웃들이 지켜봤잖아 .
내가 너무 착하다고 남의 돈 떼어먹게는 안 생겼다고 인심을 얻은 거지 . 동네 이웃들이 투자를 해준 거야 . 다 갚았지 . 이웃들이 내 재능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준거지 .
그래서 사는 데 용기가 났어 .” 큰 아들 부부와 함께 가족의 손기술을 이어나가다 15 년 전 , 큰 아들 정삼용씨 부부가 국인순씨의 사업 동료가 되었다 . 사월 초파일 , 정월달이 다가오면 밤늦게까지 일해서 만들기 무섭게 양초가 팔려다가던 시절이 있었다 .
연등 속에 들어가는 짧은 등초는 보통 초의 반절 길이로 자른 후 단면을 정리해야 하니 일이 두 배다 . 지금처럼 절단기가 없던 때에는 칼날을 연탄불에 달궈서 일일이 잘라내야 했다 . 정삼용씨 부부가 함께 일을 하면서 연탄불은 가스불로 바뀌고 양초기계도 새롭게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다 .
“ 어머니가 새벽 4 시쯤 일어나면 솥단지에 왁스를 부어놓고 가스 불 켜서 녹이는 일을 하세요 . 왁스 300kg 기준에 4 시간 정도 열을 가하면 액체로 녹아요 . 보통 아침 8 시 반에 제가 출근해서 주문받은 양초를 만드는 거죠 .
관을 연결해서 액체가 자동으로 양초 틀로 들어가는 기계도 있는데 우리는 그냥 예전 방식으로 해요 . 양동이로 퍼서 양초 틀에 붓는 거죠 . 두꺼운 초는 두 시간 정도 굳혀야 하고 엄지손가락 굵기 정도는 오 분이면 굳어요 . 여름에 작업속도가 더디지 .
온도가 낮아야 빨리 굳으니까 가을 겨울이 초 만들기 좋은 계절이죠 . 손이 빠르다고 빨리 만들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에요 . 어찌되었든 초가 굳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 지금은 특별히 바쁜 기간은 없어요 . 요즘은 전기양초를 많이 쓰더라고요 . 가내형태로 하는 양초공장들이 많이 사라졌어요 .
전국에 250 개 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70 프로 이상이 소멸할 걸로 알고 있어요 .
중국제가 싼 가격에 대량 들어오기도 하고 , 원료 값은 많이 오르고 가격이 안 맞으니까 우리 같은 소규모공장들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죠 .” 정삼용씨 부부의 옷과 신발이 촛농으로 뒤덮이는 동안 국인순씨는 주문 전화를 받고 종종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을 상대한다 .
30 년 전 거래처와의 관계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 좋은 원료를 써서 그을음이 적다는 이 집안의 양초 자부심도 있겠지만 정삼용씨는 사람 좋아하는 어머니 덕에 처음 맺은 인연들이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 국인순씨에게 자신이 처음 만든 초에 불을 붙였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고 물었다 .
다소 감성적인 질문이었을까 . 곧바로 면박을 당하고 말았다 . 딴 거 없다고 .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한 일들이라고 . 남들 눈에는 풍신 나 보여도 딱성냥 팔아서 세운 공장이다 , 내 힘으로 ! 자신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낸 사람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
호방한 할아버지는 많이 봤어도 이리도 호방한 할머니 사장님을 참으로 간만에 뵙게 되어 영광이다 . /글·사진= 장미경 (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