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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경의 삶의풍경 · 2021.01.30

속상한 일 뒤로 하고 태평가로 놀아보세

삶과 사람, 일상과 계절을 천천히 기록하는 장미경의 연재를 모았습니다.

등록 2021.01.30 14:48 조회 1,27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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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상한 일 뒤로 하고 태평가로 놀아보세 용진읍 용암마을 강춘자 강춘자 할머니가 장구 잘 친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자자했다 . 그저 사진 한번 찍어보려고 장구 앞에서 자세를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

사진 찍는 것이 영 어색했던지 춘자할머니는 눈을 질끈 감고 에라 모르겠다 , 장구채로 궁따궁따 장단을 치기 시작했다 . 나도 사진을 몇 장 찍다가 에라 모르겠다 , 즉석 공연을 감상했다 . 곧이어 익숙한 가락이 흘러 나왔다 . 내가 평소에 자주 흥얼거리던 곡조였다 .

IMG 6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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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신이 짜증날 때 그 감정을 달래기 위한 읊조림이기도 했고 , 친구가 짜증을 낼 때 위로 반 놀림 반으로 흥얼거리던 곡조였다 .

19살의 강춘자와 81살의 강춘자 “ 짜증은 내여서 무엇하나 성화는 받치어 무엇하나 속상한 일도 하도 많으니 놀기도 하면서 살아가세 니나노 닐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 얼싸 좋아 얼씨구나 좋다 ~” 태평가의 한 대목이다 .

강춘자 (41 년생 ) 할머니는 코로나로 인해 외부활동을 못하게 되었지만 슬기롭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

마당과 인근 밭에서 키우고 있는 삼백여마리의 병아리를 보살피는 일 , 오랜 친구들과 전화통화하며 서로 안부 전하는 일 , 그리고 층간소음 걱정 없이 장구를 치고 민요를 부르는 일이다 . 무아지경이 되어 장구치고 노래 부르는 것은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있던 고통을 풀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

지금의 화사하고 낙천적인 웃음 속에서 고통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 16살 초포다리근처 과수원에서 일하던 시절(오른쪽 강춘자) “ 영감 죽고 아이들 다 여의고 내 인생 이렇게 답답하게 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열심히 놀고 배웠지 . 그러니까 내 몸이 버틴 거야 .

내가 속으로 끓이면서 복작거리고 살았더라면 내 몸이 건강하덜 못해 . 마음에 담아 놓는 법이 없어 . 어디 놀러 가면 노는 데는 1 등이야 . 막 풀어내고 살았어 .

그래서 내 몸이 아직도 성하지 싶어 .” 속상한 일이 하도 많았던 시절 춘자 할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오래된 사진 한 장과 어머니에게서 전해들은 몇 가지 이야기뿐이다 .

아홉 형제의 둘째로 태어나 먹고 사는 일이 팍팍했던 시절 , 일본인이 운영하던 포목점에서 일을 해 대식구의 가장 노릇을 했고 그마저도 녹녹치 않아 이제 막 결혼 한 새 신부 떼어 놓고 중국 만주로 돈 벌러 가셨다고 한다 . 장사수완이 좋고 야무진 아버지였다 .

만주에서 돌아와 1941 년에 10 월에 춘자할머니가 태어났다 . 그해를 넘기고 꽃피는 3 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 어린 시절부터 3 월이 되면 엄마를 도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제사상을 차렸다 . “ 우리 엄마가 얼마나 고생을 했것어 . 혼자 애 키우기 힘든 시절이었지 .

나 5 살 때 재혼을 하셨는데 그때 나를 데리고 그 집으로 들어갔지 .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는 돈 잘 벌었으니까 농짱이랑 좋은 것 사서 살았었나봐 . 중인리로 재혼 갈 때 그 농짱을 구루마에 싣고 걸어갔어 . 그때부터 내가 고생하며 살아서 그런지 그때가 선명하게 기억이나 .

엄마만 꼭 잡고 따라 갔어 . 의지할 사람이 엄마뿐이잖아 . 그런데 재혼으로 간 그 집도 정말 잘 못 간 거야 . 갔더니 술에 쩔어 가지고는 이미 같이 살고 있는 여자도 있더라고 . 거기서 삼일 있다가 친 할머니가 나를 데리러 왔더라고 . 그때 기억이 선명해 .

‘ 엄마 엄마 내일 모레 나를 꼭 찾으러 와야해 .’ 그 말이 .. 지금도 어느 영화 장면 하나를 보는 것처럼 선명해 .” 할머니 손에 이끌려 엄마랑 헤어지던 다섯 살의 그 아이를 떠올리며 잠시 다독거린다 .

그 다독거림이 전해질 리 없지만 지금의 춘자할머니의 눈을 바라보며 금세 차오른 눈물을 바라보다 함께 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 수완 좋고 야무진 내 기질이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야 전주 호성동에서 아버지 형제들과 그들의 자식들과 뒤섞여 한 번도 울지 않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

학교를 다니다가 전쟁을 겪고 뒤늦게 다시 다녔지만 어린 사촌동생들 업고 학교를 다녔으니 공부를 할 수 있었겠는가 . 오히려 옆집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가 만화책으로 글을 알려줘서 그때 한글을 깨우쳤다고 한다 .

중학교도 1 년 다니다가 학비를 대주는 사람이 없어 16 살에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춘자할머니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삶을 개척하고 수완이 좋은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강춘자씨는 오로지 이 사진으로만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 “ 초포다리 근처에 과수원이 많았어 . 거기서 하루 품삯을 5 원씩 받아가면서 일을 시작 한 거야 . 돈을 조금씩 모아서 그걸로 황소 송아지를 샀어 . 주변에 소문을 냈지 . 나 일할 때 소개 좀 해 달라고 .

전주 코아백화점 자리에 일본사람이 운영하던 제사공장 (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공장 ) 이 크게 있었어 . 17 살 무렵에 거기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거야 . 그때 참 예뻐서 주변에서 미스코리아 나가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 .

그 공장이 불이 나는 바람에 동양제사에서 1 년 일하고 그 뒤로 개인 공장에서도 일을 했지 . 누에에서 실 뽑는 기술로 계속 일을 한 거지 . 연탄불 피워서 양은대야 올려서 물을 끓여 . 누에고치를 끓는 물에 삶아 .

그럼 거기에서 실이 한 올씩 올라와 그걸 하나로 엮어 뽑아서 그 실을 물레에 감는 거지 .” 24살이 되던 해 결혼식 사진 24 살에 용진 용암마을로 시집와서 사남매를 낳고 키우면서도 논일 밭일 해주며 품삯을 벌고 그 돈으로 쌀 계를 해서 목돈을 모으고 마을 입구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면서 아이들 학교 졸업시켰다 .

딱 십년 가게 운영을 하고 장사를 접었다고 한다 . 남편의 과음이 심해져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 50 대 중반 무렵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전세방을 얻고 1 년 동안 안 다닌 곳 없이 실컷 서울구경을 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

몇 년 뒤 59 세 나이로 남편 황동연씨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 춘자할머니 57 세 되는 해였다 . 슬픔 속에 파묻혀 지낼 수는 없었다 . 이제 비로소 내 인생 자유롭게 살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

서울에서 잠시 살던 시절 큰 아들 부부와 함께 “ 내가 평생 남 눈치만 보고 살다가 다 늙어서는 즐겁게만 살았어 . 전주에서 병원 , 아파트 청소일 하면서 돈도 벌고 사교댄스도 배우고 국악원도 한 5 년을 다녔어 . 국악원에서 타악기랑 춤이랑 민요를 배웠지 . 안 다녀 본 데 없이 공연도 다녔어 .

그 뒤로 노인복지원에서 컴퓨터 , 수영도 배우고 그랬지 . 산악회 활동도 하고 낚시도 다니고 캠핑도 하고 그랬지 . 일흔 살까지는 실컷 놀았어 . 그 무렵에 집이 낡아서 고쳐야 했는데 그냥 집을 다 허물로 새로 지은거지 . 딱 6 천 들어서 집 지었어 . 내가 번 돈으로 집을 지은거지 .

나는 살면서 남한테 손 내밀어 본 적 한 번도 없어 .

내가 벌어먹고 살았지 .” 남편 황동연씨가 먼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강춘자씨는 그동안 못했던 세상여행을 시작했다 소일거리 삼아 마당에서 닭, 기러기, 원앙 온갖 조류를 키우고 있다 혼자 살아도 괜찮다고 , 오히려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니냐며 나를 위로해주는 할머니는 강춘자 할머니가 처음이었다 .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뭐냐고 물으니 대한민국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일이라고 한다 . 속상한 일 잠시 뒤로 하고 놀기도 하면서 올해를 살아갑시다 !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현장 사진

속상한 일 뒤로 하고 태평가로 놀아보세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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