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손재주로 진득하니 살아온 삶 (下) - 동상 황조리마을 김맹준 이야기 하염 없이 내린 눈에 모두 무사하신지요 . 오가는 길은 제설이 되었는지 , 엄동설한에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지 , 이 추위도 곧 물러가겠지요 . 몇 년 만에 매운 추위와 함께 많은 눈이 내렸다 .
만나는 사람마다 걱정스럽게 안부 인사를 나누면서도 오랜만에 마주한 설경에 잠시 일상을 멈추고 오래도록 산이나 들판을 바라본다 . 지난달에 이어 동산면 황조리마을 김맹준 (1955 년 생 ) 씨 이야기는 계속된다 . 그 역시 잠시 일상을 멈추고 올라야 할 산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
“2 월 초면 황새목에 고로쇠 채취하러 올라가야 하는데 오늘 오후에도 눈이 온다고 하네요 . 표고목 구해서 구멍도 뚫어 놓아야 하는데 산을 못 올라가 . 동상면은 다른 곳이랑 10 도 차이 난다고 보면 돼요 .
계곡이 깊어서 다른 곳보다 추워요 .” 어린 나이에 시작된 김맹준 씨의 노동연대기는 24 살 무렵 고향을 떠나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
고향 떠나 살라는 어머니의 말에 16 살 여동생과 함께 익산에서 월세방을 얻고 , 동양물산에 취직한 그는 자연 속에서 흙을 만지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 뛰어난 일머리 덕분에 금세 공장일에 적응할 수 있었다 . “ 그런데 월급이 너무 적더라고 .
15 일 주간 , 15 일 야간일을 하는데 4 만 8 천원을 주데 . 전주 사는 삼촌한테 돈 잘 버는 일 소개해 달라고 그랬더니 내가 손재주가 좋으니까 자개 깎는 기술을 배우라고 하더라고요 . 내가 18 살에 대구에서 장롱 조각하는 일도 했었거든요 .
그 당시 전주 장승백이 날맹이에 자개 깎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기술을 배운 거지 . 하나 깎으면 오백원 , 한 시간에 두 개 깎는다 치면 하루에 만원 벌겠더라고요 . 그때는 자개농이 인기 많았던 시절이니까 일감도 많았죠 .
두 달 반을 일했는데 이 양반은 사업가가 아니라 예술가 같은 사람이어서 돈에 대한 개념이 없었어 .
익산에서 전주까지 다니는데 차비도 못 줄 정도니까 그만두고 내 사업을 해야겠다 마음을 먹었어요 .”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사만원 , 어머니가 누에고치 팔고 건넨 사만원 , 여동생의 월급 삼만원을 모아 공장을 차렸다 .
자개를 세밀하게 자르기 위해 치과에서 사용하는 세공기 한 대와 책상 하나를 마련해 혼자 시작한 작은 공장이었다 . 다행히 주변에 가구공장이 많아 일이 자주 들어왔고 , 자개농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이었다 . “ 사람이 뭔가 되려면 운이 따르는 거에요 . 일단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시작한 거죠 .
말이 공장이지 오십만원 짜리 이간장방을 얻어서 가운데 합판을 대고 한쪽에서 동생이랑 나랑 살고 한쪽을 작업실로 꾸린 거지 . 익산 살 적에 그때 일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 일거리는 서울에서도 밀려왔어요 . 솜씨가 좋고 내가 수공비를 싸게 받았어 .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 다른 사람들 가격보다 3 분의 1 저렴한 가격으로 작업을 했던 거였더라고 . 일이 많으니 직원도 두고 작업했는데 솜씨가 다르니까 나 혼자 그냥 했지 . 조개껍데기는 주로 인도네시아산 소라껍데기로 했지 . 거친 부분 벗겨내고 판판한 부분만 포개진 상태로 수입이 돼요 .
비싼 원료지 .” 열심히 일하다 보니 목돈을 모을 수 있었고 2 년 만에 작은 집 한 채를 장만하게 되었다 . 일감이 넘쳐나는 시절이어서 혼자 작업하기 벅찰 때면 광주의 자개 깎는 공장에 일을 맡기기도 했다 .
김맹준 씨는 자개원료 20kg 을 등에 지고 1980 년 5 월 15 일 , 광주 충장로를 찾았다 . “ 자개 깎는 곳이 충장로에 있다고 해서 무작정 간 거야 . 공장 사장한테 물건을 맡기고 19 일에 찾으러 갔더니 가게 문이 닫혀 있더라고 .
전화를 했더니 ‘ 지금 자개가 문제냐고 빨리 도망가라 ’ 는 거야 . 그것이 백만원이 넘는 거였는데 어떻게 놓고 가는가 . 어렵게 그 사장 집을 찾아갔는데 오늘 밤 익산 가기는 틀린 것 같더라고 . 그래서 그 집 사장이랑 데모하러 충장로에 가본 거지 .
데모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는데 그때 처음으로 수류탄 냄새를 맡은 거지 . 여기 계속 있다가는 다 죽겠더라고 . 그 사장도 식구들 데리고 피난 가면서 헤어지고 이튿날 길거리에서 사람들이 라디오를 틀어놓고 듣고 있는데 ‘ 광주 시민 2 명이 죽었다 ’ 고 앵커가 말하니까 온 시내가 순간 들썩거렸어 .
몇 천명이 죽어나갔는데 뉴스에서 그런 거짓말을 하니까 . 그 길로 피난 가는 사람들 따라서 90 리를 걸어서 영광 문장리까지 갔어 . 그때 만난 우체부 아저씨가 참 고마웠어 . 낯선 나를 자기 집에서 재워주고 밥도 주고 빠져나갈 길을 알려줬지 .
몇 년 전에 다시 그곳을 찾아가봤는데 그 분을 도무지 찾을 수 없더라고 . 자전거를 타고 50 리 자갈길을 달려 장성으로 갔더니 광주로 들어가려는 외신기자들이 드글드글혀 . 길목마다 군부대하고 탱크가 길을 막아놓았는데 나는 다행히 군인들이 보내주더라고 .
장성에서 백양사까지 걸어서 정읍에서 기차 타고 탈출했지 .” 안방의 위풍당당하던 자개농은 서서히 사라졌고 원목가구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그는 가구 도소매업으로 업종을 변경했다 . 하는 일마다 잘되던 시기였다 . 전주에 단독주택도 마련하고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사업을 키웠다 .
1994 년 10 월 여의도에서 제 1 회 전통공예품박람회가 열렸고 김맹준씨도 많은 돈을 투자해 전통가구 전시공간을 마련했지만 성수대교가 붕괴되며 모든 행사는 취소되었다 . IMF 를 겪으며 가구사업을 정리하고 그는 다시 고향의 흙을 만지는 삶으로 돌아왔다 .
김맹준씨는 영화 ‘ 포레스트 검프 ’ 의 주인공처럼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사건들을 마주하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 일흔을 넘긴 그는 어린 시절 자주 앉아 있던 마을 개울가에 자리를 잡고 , 여전히 흐르는 물과 산을 바라본다 .
혼자서 한나절을 앉아 있으면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 세상의 풍랑을 모두 겪고 단단해진 김맹준 씨의 이야기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열아홉 살 시절 , 소나기에 온몸이 젖어 씩씩거리고 있는 자신에게 건네는 듯한 말 같다 .
“ 황새목에서 담배잎 따서 지게에 이고 개울가 허청 ( 헛간 ) 있는 대로 오려면 보통 4 번은 쉬어야 올 수 있어 . 거리가 그만큼 멀어 . 그날따라 비구름이 몰려오더라고 . 조바심이 나서 그 먼 길을 한 번도 안 쉬고 내려온 거야 . 생담배잎이어서 비에 맞아도 암시랑 안하는데 말이야 .
허청에 도착하니까 비가 막 쏟아지더라고요 . 그 비를 다 맞았지 . 얼마나 한심한지 , 서글프더라고 . 잠깐 퍼붓다가 해가 뜨는데 그 모래밭 사이에서 잡초가 올라와서 꽃이 폈더라고 . 봄에 봄비를 맞고 새싹이 똑같이 올라와도 다 달라요 .
어떤 놈은 꽃부터 피다가 일찍 삶이 끝나고 어떤 놈은 늦은 가을에 꽃을 피우기도 하고 . 사람의 삶도 똑같잖아요 . 어떤 사람은 부모 도움으로 일찍 피기도 하지 . 내 삶은 고달펐지만 사는 날까지 내 힘으로 살아야지 그 생각밖에 없어요 .
나는 스스로가 피어난 꽃이야 .” / 글·사진=장미경 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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