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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경의 삶의풍경 · 2024.08.06

고향마을 파출소장 이승렬 씨 이야기

삶과 사람, 일상과 계절을 천천히 기록하는 장미경의 연재를 모았습니다.

등록 2024.08.06 11:31 조회 87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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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삼기리 종암마을입니다 - 고향마을 파출소장 이승렬 씨 이야기 고산 삼기초등학교는 ‘1946 년 고산초등학교 삼기분교로 문을 열어 2003 년 삼우초등학교와 통합되며 문을 닫기까지 57 년 동안 3,500 여명의 아이들을 길러냈다고 한다 .’( 위키백과 ) 20 여 년 전에 삼기초등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 이 학교의 터는 완주커뮤니티비즈니스센터 , 공동체지원센터 , 귀농귀촌지원센터 , 로컬푸드 가공센터로 명맥을 이어왔고 지금은 완주군 미래행복센터가 자리하며 지역의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활동의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으니 , 어쩌면 이 학교는 참 복이 많은 터에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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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 살던 내가 완주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이 학교에서 열린 2012 년 퍼머컬처학교 과정이었으니 나도 이 터가 가진 복을 조금은 나누어 받지 않았을까 싶다 .

38 년 동안 경찰관으로 근무했고 고산파출소장을 끝으로 지난 6 월 30 일에 퇴직한 이승렬 소장님은 삼기초등학교 25 회 졸업생이다 . “ 고향은 종암마을입니다 . 삼기초등학교를 나왔어요 . 신작로 길이 있었지만 , 봉림재를 넘어서 다녔죠 . 부모님은 가난한 농부였어요 .

학교 갔다 오면 소 풀 베다가 먹이고 그랬지요 . 제가 3 남 2 녀 중에 장남이에요 . 그래서 부모님 일을 많이 도왔지요 .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는 안했어요 . 중간치기를 많이 했죠 . 산에 올라가서 중간치기를 열 명이 하면 서너 명이 더 놀다가 들켜서 혼나기도 하고 그랬어요 .

학교 갔다 재를 넘어오면서 개구리 잡아서 구워서 먹고 그랬죠 . 봄 되면 산에 가서 진달래 꺾어서 먹고 . 나 학교 다닐 때는 한 학년에 60 명씩 두 반이었어요 . 제가 살아보니까 고산이 물이 진짜 좋아요 . 그때는 다슬기를 많이 잡았어요 .

마을 어머니들이 다슬기를 잡아서 아이들 학비 조달하고 그랬죠 . 다라이에 다슬기를 한가득 잡아서 팔았어요 .

마을에 중앙시장에서 다슬기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 , 우리 동네 사람들이 낮에 잡은 다슬기를 밤에 그 사람 집에 가서 무게 달아서 팔고 그랬죠 .” 이야기를 나누다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나는 작년 여름에 이승렬 소장님을 만난 적이 있었다 .

비가 많이 내리던 저녁에 친구를 태우고 원산마을에 들어섰는데 큰 나무가 길 위로 쓰러져 있어서 119 에 신고를 했고 10 분쯤 후에 현장에 맨 처음 도착한 분이 바로 이승렬 소장님과 동료 경찰분들이었다 .

그때 소장님은 소방관 , 경찰관 , 면장님과 함께 밤늦게까지 쓰러진 나무를 치우고 면장실에서 함께 라면을 끓여 먹었던 것을 기억해내셨다 .

보통 공직자들은 자기 고향으로 발령받을 때 망설이기도 한다는데 이승렬 소장님은 오히려 고향인 고산파출소 근무를 자원했고 그곳에서 경찰 생활의 마지막 1 년 3 개월을 고향 주민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38 년 경찰생활 중에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

“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에서 의경으로 군대를 마치고 바로 경찰시험 합격해서 초임을 무주에서 근무했죠 . 무주에서는 6 년 정도 근무했고 전주에 10 년 있다가 완주경찰서에서 한 20 여 년간 근무했어요 .

경찰근무시절(이승렬 사진제공) (3)
경찰근무시절(이승렬 사진제공) (3)

그 사이에 군산도 가고 장수도 가고 했는데 그래도 길게 있었던 곳은 무주 , 전주 , 완주에요 . 완주가 가장 오래됐죠 . 우리 집이 가난했지만 , 어머니가 자식 욕심이 많았어요 . 사람들이 그랬어요 . 시골애들인데 도회지 아이들 같다고 .

항상 옷도 깨끗이 입히고 머리도 상고머리로 깔끔하게 잘라놓고 . 사람들이 다 칭찬했어요 . 우리 어머니 성함은 박영자 . 72 세에 돌아가셨어요 . 사랑이 크신 분이었죠 . 그런 어머니가 살아생전에 그러셨지요 .

‘ 고산파출소 소장 한번 하면 좋겠다고 .’ 그런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고산파출소 소장으로 가게 됐어요 . 그래도 너무 좋았습니다 . 고향 분들이 참 따뜻하더라고요 . 너무나 고마웠고 너무나 많은 대우를 받았죠 . 고향 친구들도 사회활동 활발하게 많이 하고 있는데 도움도 많이 주고 환대해줬죠 .

지난 일이지만 생각할수록 감사한 일입니다 . 경찰이라는 것을 해보니까 범인을 검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경찰이라는 존재가 주민들에게 안심을 줘요 . 저는 고산파출소 근무할 때 항상 외등을 켜놓으라고 했어요 . 밤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불을 보기만 해도 안심할 수 있게 .

마치 등대처럼요 .” TV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경찰이 언제나 범인을 잡으러 다니며 다소 강압적인 느낌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많은 경찰은 시민들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밤낮없이 보살피는 일을 하고 있다 .

어떻게 하면 교통사고를 줄일 수 있을까 , 어떻게 하면 보이스피싱 피해를 하나라도 더 예방할 수 있을까 . 이승렬 소장님은 이런 일들이 경찰의 가장 중요한 업무라고 했다 . “ 고산지역은 의외로 교통사고가 많아요 . 보이스피싱 사고도 많고요 . 그 두 가지를 줄이기 위해서 중점적으로 노력했죠 .

교통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 도로 위 카메라 설치 작업도 진행했고 , 보이스피싱 관련된 것은 농협 , 새마을금고 , 신협 책임자들과 수시로 회의하면서 예방도 많이 했죠 . 전라북도만 해도 보이스피싱 피해 발생액이 연 60 억 정도고 작년에 전국적으로 신고된 피해 발생액이 천억 정도 됩니다 .

고산 같은 경우도 하루 한 건 정도는 발생한다고 보면 되죠 . 이건 어르신들만 당하는 것이 아니고 젊은 연령대도 피해를 많이 입습니다 . 퇴임하기 전까지 마을마다 다니면서 주민들을 직접 만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다 이루진 못했네요 . 나름대로 하긴 했는데도 시간이 짧아서 다 이루진 못했죠 .

경찰근무시절(이승렬 사진제공) (4)
경찰근무시절(이승렬 사진제공) (4)

고향이라서 더 열심히 일했던 것 같아요 . 어머니가 보셨으면 참 좋아하셨을 텐데 아마 하늘에서 보고 계셨겠죠 .” 소장님은 경찰이 천직인 것처럼 보였다 . 그리고 천성이 잘 쉬지 못한다고 했다 .

현직에 있을 때도 3 일 이상 휴가를 간 적이 거의 없어서 퇴직하면 여행이나 실컷 다니고 편안하게 쉬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결국 며칠 쉬지도 못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다 . “ 제가 무주에 처음 발령 났을 때 그 마을 이장님이 저한테 경찰 할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어요 .

아무리 봐도 학교 선생님을 하면 딱 맞겠다고 . 인상이 경찰인상이 전혀 아니라고요 . 제가 순하게 생겨서 그런가 봐요 . 그래도 제가 38 년 경찰 생활 하는 동안 징계 하나 안 먹었어요 . 원래 경찰이 다른 공무원에 비해 징계가 많은 편인데 저는 한 번도 없었죠 .

시말서 하나 사유서 하나 제출해본 적 없어요 . 지나고 보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 제가 경찰 시작할 때만 해도 경찰이 지금처럼 친절하지 않았어요 . 어쩌면 강압적이어야 하는 직업이었는데 저는 그 당시에도 그냥 친절하게 잘 대해줬어요 . 지금의 경찰상이랑 맞았던 거죠 .

경찰이라는 게 언제나 주민 가까이 있어야 해요 .” 이승렬 소장님은 퇴직하고도 고산지역의 주민분들로부터 7~8 번의 송별회를 받았다고 한다 . 그 뒤로도 몇 군데 더 송별 모임을 제안받았지만 고마운 마음만 받고 사양했다고 한다 .

어두워지면 고산파출소에 항상 켜두셨던 외등처럼 성실하고 우직하게 자신의 일을 지켜낸 것에 대한 당연한 대우였을 것이다 . 소장님이 새로 일을 시작하신 일터에서도 외등처럼 , 등대처럼 잔잔하게 빛을 밝히는 삶을 사시길 기대한다 .

/ 글·사진=장미경 (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현장 사진

고향마을 파출소장 이승렬 씨 이야기 사진 1 고향마을 파출소장 이승렬 씨 이야기 사진 2 고향마을 파출소장 이승렬 씨 이야기 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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