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장미경의 삶의풍경 · 2022.11.30

경천면 신덕마을 남춘자 할머니

삶과 사람, 일상과 계절을 천천히 기록하는 장미경의 연재를 모았습니다.

등록 2022.11.30 15:48 조회 1,000 댓글 0
목록으로 돌아가기

이제는 농사 안짓는다고 하시면서 집 건너편 천평, 집 마당 오십 평 정도 밭은 재미삼아 왔다갔다 하신단다. 자식들 주려고 쥐눈 이콩을 수확하고 있는 남춘자 할머니.

내가 이 동네 일 대장이여 손닿는 곳에서 멀어진 어딘가에 먼지 쌓인 채로 방치되어 있는 사진첩들을 열어보면 시간여행자가 된 듯 순식간에 20~30 년쯤의 시간은 거뜬히 넘나들게 된다 . 하지만 오래된 사진첩을 열어본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되어간다 .

IMG 3784
IMG 3784

스마트폰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어 가벼운 손동작 하나 만으로 무엇이든 불러 올 수 있으니 말이다 . 편리하지만 오히려 스스로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들이 많아지는 나날 , 나만 그러할까 ? 남춘자 할머니의 (79 세 ) 기억은 오로지 머릿속에 있다 .

지금은 즐거운 순간을 찰칵찰칵 쉽게도 기록하고 공유하지만 할머니 젊은 날의 순간들을 오로지 그 마음 안에 있다 . 머릿속의 기억이 입말로 전해지는데 그 말들이 보는 것 보다 더 생생하다 .

자신이 살아온 과정은 책을 내도 몇 권 낼 것이다 , 원고를 쓰고 죽어야 하는데 쓸 지도 모르고 어찌하나 했더니 막내며느리가 지금부터 쓰시라고 ,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 쓰시라고 했다는데 우리의 만남은 시기적절한 만남이었다 .

순전 남자 하는 일만 하고 살았지 남춘자 할머니 젊은 시절 한 동네 결혼은 드문 일이었다 . 서로 속사정 알고 지내는 것이 민망해서 되도록 멀리 시집을 보내는 것이 수순인데 남춘자 할머니는 신덕마을 신작로 건너 구수굴로 시집을 왔고 여든을 앞둔 일생을 살아왔다 . “ 초등학교 2 학년 다니다 말았어 .

전쟁 터져서 피난 가서 고생하고 돌아와서는 다른 사람들은 학교 다니는데 나는 못 다녔지 . 학교 이야기 하니까 또 눈물 나네 .. 나는 돈도 없었는데도 무작정 그냥 학교에 갔어 . 책도 안사고 뭣도 안 사줘도 그냥 교실에 앉아 있었어 . 근데 나중에는 내가 너무 부대끼니까 안 나갔지 .

학교에서 회비 내라고 눈치를 주고 괴롭히니까 어린 아이가 당해낼 수가 있나 .. 집이 하도 가난하니까 나를 양딸로 보내려고 했는데 내가 그러기는 싫다고 남의 집 살면서 돈이라도 벌어서 집에 보탠다고 그랬지 . 열 몇 살 먹었을 때부터 남의 집 살이를 했어 . 그때도 일 잘한다 소리 듣고 대우받았지 .

우리 친정아버지가 새끼들은 많고 집은 가난하니까 딸들을 아무렇게나 여의고 그랬지 . 나는 결혼이 뭔지도 몰랐어 . 18 살에 결혼해서 19 살에 큰 아들 낳았지 .” 시집 안 간다고 아버지랑 싸우기도 많이 싸웠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이 친정아버지라고 한다 .

평생 산에 가서 일만 하다 이 좋은 세상 구경도 못하고 60 대에 돌아가셨으니 말이다 . 산일은 논밭이 없는 가난한 이들이 기어코 먹고 살기 위해 하는 험한 일이다 . 남춘자 할머니는 남자들도 하기 힘들다는 그 험한 일은 하며 젊은 날을 보냈다 . “ 산으로 싸리 찌러 다녔어 .

싸리나무를 낫으로 끊어서 가지고 오는 일을 그렇게 불렀어 . 시집오자마자 다니던 일이야 . 아이 뱃속에 있을 때 부텀 . 동네 형님이랑 같이 새벽 4 시에 나가서 집에 오면 저녁 8 시야 . 싸리 찌러 50 리 길을 걸어갔어 . 요동재 , 용재원재 , 마당재를 넘어 운주 피묵리 삼거리까지 갔지 .

하이고 , 지금은 거기 돈 1 억 있으니 가서 찾아오라고 해도 못가 . 이짝 산에 올라가 싸리 끊어서 한 군데 모아놓고 저 짝 산에 올라가서 한 다발 끊어 모아놓아 . 다 모으면 20~30 킬로씩 되었어 . 그것을 질빵으로 묶어서 짊어지고 내려오는 거지 .

그렇게 고생은 했어도 우리 시어머니가 친정어머니보다 좋더라고 . 왜 좋냐 . 시어머니가 새벽에 일어나서 밥을 하는데 한 쪽에는 쌀을 한 쪽에는 서석을 앉혀 . 그럼 나만 쌀밥으로 도시락을 싸줘 .

그럼 내가 어휴 어른들이 쌀밥 드셔야지 괜찮다고 하면 , 너는 산에 가서 허적거리고 돌아다니려면 얼마나 배고프겠냐 .. 그러면서 쌀밥을 싸주는 거야 . 깐 밥도 긁어서 싸주고 .

산에서 일하다가 냇깔 근처에서 물 한 모금씩 떠먹으면서 그 밥을 먹었지 .” 싸리나무를 해 와서 솥에 삶아 쪄서 겉껍질을 벗겨서 그 재료를 고산 장날에 가서 판돈으로 보리사고 쌀을 샀다 . 험한 산에 오르며 가시에 걸려 찢어지고 해지는 옷과 신발은 기워 입어도 금세 찢어지곤 했다 .

지금 입고 있는 옷을 어루만지며 이것들은 왜 이리 질긴지 , 어서 떨어져 또 사 입고 싶은데 왜 이리 질긴지 모르겠다며 웃어넘기신다 . 일 잘한다고 소문난 동네 일꾼 첫째 , 둘째 아들 장가보내고 막내아들 대학 다니던 때 급성간경화로 남편 분이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

평생을 일만 하고 좋은 것 구경 못하고 떠난 친정아버지처럼 남편 또한 그러했다 . 춘자 할머니 50 세 되던 해 , 슬픔이나 두려움이 들어설 마음의 공간조차 없었다 . 자신의 아이들만은 지게 밑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해 뜨기 전에 일하러 나섰다 . “ 남편 죽고는 오로지 돈이었어 .

밖에서 일했는데 그게 두렵지는 않았어 . 맥주 공장에서는 미화부 일을 했어 . 정원이 엄청 컸어요 . 거기서 밭을 매고 나무 심고 . 그리고 옛날 전주백화점 들어가는 골목에 짱구만두 분식집에서 주방 일을 몇 년 다녔지 . 번영로 신문보고 무작정 찾아가서 중앙여고 급식실에서 주방일도 했지 .

첫차로 갔다가 막차로 와 . 저녁에는 7 시쯤 끝나면 버스타고 고산 와서 8 시 40 분에 운주 가는 막차가 있는데 대간하고 그러니까 졸다가 운주까지 간적도 많아 . 어떻게 할 수 없으니 택시타고 집에 온 적도 있지 .

그렇게 악을 쓰고 돈 벌러 다녔어 .” 막내아들 장가보내고 60 대 무렵부터는 주로 삼밭에서 일했다 . 인삼 수확하는 작업은 분업화 되어 있는데 춘자 할머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삼 선별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 “ 일 많이 하고 잘한다는 소리 들어요 . 선별하는데 나 따라오는 사람 없어 .

삼밭에 들어가서 삼을 캐면 16~7 가지가 나와요 . 제일 큰 것들 중에서 특대 , 대대 , 중대 , 소대 , 믹서 . 그 다음을 삼계라고 하는데 대삼계 , 중삼계 , 소삼계 . 잔삼계 , 실실이 , 파삼 , 이렇게 개려놔야 하는 거지 .

보통 20~30 명이 팀이 되어서 움직이는데 삼밭은 주로 금산에 많이 있고 팀 꾸리는 사람을 놉대장이라고 혀 . 젊어서는 내가 경천 놉대장이었어 . 금산 놉대장이 지금도 나한테 전화가 와 . 같이 일하자고 . 그런데 요즘은 아파서 못한다고 해 . 우리 아들들이 나 어디 일하러 간다면 난리야 .

농사짓는 사람들이 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루만 와서 풀 매달라 하루만 살려 달라 사정을 해 . 지금은 돈 때문에 일가는 거 아냐 . 지인들이 농사짓는데 내 손 필요하다고 하니까 .. 내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아 . 나를 좋아라해 .

힘들어도 웃어감서 재밌게 일하니까 .” 볕 좋은 가을 오후 쥐눈이 콩을 타작하는 남춘자 , 집 마당 배추밭에서 웃고 있는 남춘자 , 가족사진을 보며 흐뭇해하는 남춘자 , 핸드폰에 담겨 있는 손주들 사진을 보는 남춘자 .

춘자 할머니의 젊은 나날은 자신의 가슴 속에만 있지만 일흔 아홉 가을날 , 남춘자 할머니의 빛나는 모습을 찰칵찰칵 사진으로 찍어 남겨 둔다 . 시간이 흐른 뒤에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도록 .

/ 글·사진= 장미경 (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현장 사진

경천면 신덕마을 남춘자 할머니 사진 1

첨부자료

댓글 0

댓글은 로그인 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