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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눈엔 풍신날지라도 딱 성냥 팔아세운 내 공장! 이라오2022-04-19

남들눈엔 풍신날지라도 딱 성냥 팔아세운 내 공장! 이라오

스물세 살, 백일도 안된 큰 아들을 업고 딱성냥을 팔았던 국인순 씨. 40대 후반에 사업자등록을 하고 양초공장을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그때의 인연이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삼례 무궁화 양초 국인순 씨 이야기


기계공업이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거대생산방식이 주를 이루게 되면서 동네에 적정하게 자리 잡았던 작은 공장들은 빠르게 사라져갔다.

삼례 마천 마을에 가내 수공업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는 양초공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반가운 마음이 앞섰다. 이런 곳에 공장이 있을까 하는 곳에 삼십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간판은 없지만 찾아올 사람은 다 찾아오는 곳이다. 나처럼 초행길에 길을 헤매게 된다면 지나가는 어르신에게 물어보면 된다. 동네 사람들은 그냥 양초집이라고 부른다. 무궁화 양초집 사장, 국인순(76) 씨는 이 동네 사람치고 양초 공장에서 일 안 해 본 사람 없다고 한다.

 

마을에서 놉 얻어서 일 많이 했었지. 다 한 번씩은 우리 공장 거쳐 갔지. 특별한 기술 없어도 와서 배워가며 일하면 되니까. 우리 마을 근처에는 공장이 없었어. 이 주변에는 다 농사짓는 사람들이었지. 그러니까 우리 집에서 틈틈이 일을 했어. 서로 마을 이웃으로 신용도 있으니까 믿고 일하기 좋잖아요. 경로당 없을 때는 우리 집이 마을 사랑방이었어. 나한테 사람들이 잘 붙어. 늘 내 주변에 더글더글해. 우리 집 아저씨 있을 때는 남자들이 바글바글했었어. 내가 술상 다 챙겨주고 그랬어. 그러니까 동네사람들이 좋다고 우리 집에서 자주 모였지

 

동네 사람들을 고용해서 함께 일하고 서로 연결되고 살피는 관계망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던 것이다. 일종의 마을기업 아니었을까. 국인순씨는 40평 남짓한 지금의 공장을 특별히 고치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천장, 벽면과 바닥을 꼼꼼히 살펴보며 무궁화양초의 가내수공업 역사를 되돌아본다. 켜켜이 쌓이고 쌓인 촛농처럼 국인순씨 가족의 삶과 이 곳에 놀러와 함께 웃고 먹고 마시며 일했던 동네 사람들의 삶이 쌓여 있는 듯하다.

 

딱성냥 팔아서 양초공장을 세우다

22살 때 삼례로 시집 온 국인순씨는 그 해에 첫 아이를 낳고, 자신의 인생을 걸고 큰 결심을 해야만 했다. 고향 마을 살던 큰 애기 시절에는 숫기가 없어서 보따리 하나도 못 들고 다녔던 아이였다. 그렇게 순진했던 22살의 인순씨는 오로지 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백일도 안 된 아이를 등에 업고서.



왼쪽부터_ ①양초의 원료인 왁스들이 창고 한 쪽에 쌓여 있다. ②왁스를 솥에 부어 끓이면 액체가 된다. ③액체가 된 왁스 를 양동이에 담아 양초틀에 붓고 2시간 정도 기다리면 단단한 양초가 만들어진다. ④아래 장치를 발로 눌러 틀안에 굳은 양초만 들어올린 후 촛농을 정리한다. ⑤완성된 초는 절단기에 넣고 일정한 크기로 잘라준다. ⑥촛농이 떨어져 작업복과 신발에 눌러 붙었다. ⑦인순 씨가 쓰던 장부 ⑧가장 가느다란 굵기60호짜리 양초기계. 이 굵기의 초는 5분이면 완성된다.


시집오니까 아무것도 없어. 십 원하나 없어. 신랑이 못 벌면 내가라도 벌어야지. 우리 아들 백일 때부터 장사를 시작했어. 무슨 장사를 했냐면 딱성냥을 팔았어. 벽에 그시면 불이 붙는 성냥이야. 그 당시 성냥 도매집이 삼례에 있었어. 논산에 비사표 공장이 있었는데 거기서도 물건 떼어다 팔고 그랬지. 버스타고 전주, 익산으로 다니면서 물건을 참 잘 팔았어. 아이 셋 다 업고 다니면서 팔았지. 아이 낳고 몸 풀 세도 없이 성냥 팔러 다닌 거지. 그 당시 나 말고여럿 아줌마가 팔고 다녔는데 내가 제일 오래 남았어. 참 잘 팔았어. 가는데 마다 장사를 너무 잘 한다고, 버스에서 물건 내려놓으면 금세 팔렸지. 십 원도 없는데 보따리 장사 하면서 돈을 만들었지. 모은 돈으로 쌀 계 하고 그렇게 목돈을 모아서 공장을 세운거야.”

 

국인순씨 40대 후반에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양초 기계 세 대로 사업을 시작했다. 자신의 사업을 해 볼 생각을 하게 된 건 동네 사람들의 부추김이었다.

 

그 당시 공장 세울 만큼의 돈이 있지는 않았는데 이웃집 사람들이 농협 가서 빚을 얻어줬어. 장사를 너무 잘하니까 남의 집에서 떼어다 파느니 내 장사를 하라고. 내가 동네에서 신뢰가 좋았나봐. 성냥 팔고 애들 셋 키우는 과정을 동네 이웃들이 지켜봤잖아. 내가 너무 착하다고 남의 돈 떼어먹게는 안 생겼다고 인심을 얻은 거지. 동네 이웃들이 투자를 해준 거야. 다 갚았지. 이웃들이 내 재능을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준거지. 그래서 사는 데 용기가 났어.”

 

큰 아들 부부와 함께 가족의 손기술을 이어나가다

15년 전, 큰 아들 정삼용씨 부부가 국인순씨의 사업 동료가 되었다. 사월 초파일, 정월달이 다가오면 밤늦게까지 일해서 만들기 무섭게 양초가 팔려다가던 시절이 있었다. 연등 속에 들어가는 짧은 등초는 보통 초의 반절 길이로 자른 후 단면을 정리해야 하니 일이 두 배다. 지금처럼 절단기가 없던 때에는 칼날을 연탄불에 달궈서 일일이 잘라내야 했다. 정삼용씨 부부가 함께 일을 하면서 연탄불은 가스불로 바뀌고 양초기계도 새롭게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다.

 

어머니가 새벽 4시쯤 일어나면 솥단지에 왁스를 부어놓고 가스 불 켜서 녹이는 일을 하세요. 왁스 300kg 기준에 4시간 정도 열을 가하면 액체로 녹아요. 보통 아침 8시 반에 제가 출근해서 주문받은 양초를 만드는 거죠. 관을 연결해서 액체가 자동으로 양초 틀로 들어가는 기계도 있는데 우리는 그냥 예전 방식으로 해요. 양동이로 퍼서 양초 틀에 붓는 거죠. 두꺼운 초는 두 시간 정도 굳혀야 하고 엄지손가락 굵기 정도는 오 분이면 굳어요. 여름에 작업속도가 더디지. 온도가 낮아야 빨리 굳으니까 가을 겨울이 초 만들기 좋은 계절이죠. 손이 빠르다고 빨리 만들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에요. 어찌되었든 초가 굳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지금은 특별히 바쁜 기간은 없어요. 요즘은 전기양초를 많이 쓰더라고요. 가내형태로 하는 양초공장들이 많이 사라졌어요. 전국에 250개 정도 있었는데 지금은 70프로 이상이 소멸할 걸로 알고 있어요. 중국제가 싼 가격에 대량 들어오기도 하고, 원료 값은 많이 오르고 가격이 안 맞으니까 우리 같은 소규모공장들은 자리를 잡을 수가 없죠.”

 

정삼용씨 부부의 옷과 신발이 촛농으로 뒤덮이는 동안 국인순씨는 주문 전화를 받고 종종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을 상대한다. 30년 전 거래처와의 관계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좋은 원료를 써서 그을음이 적다는 이 집안의 양초 자부심도 있겠지만 정삼용씨는 사람 좋아하는 어머니 덕에 처음 맺은 인연들이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국인순씨에게 자신이 처음 만든 초에 불을 붙였을 때 어떤 기분이었냐고 물었다. 다소 감성적인 질문이었을까. 곧바로 면박을 당하고 말았다. 딴 거 없다고.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한 일들이라고. 남들 눈에는 풍신 나 보여도 딱성냥 팔아서 세운 공장이다, 내 힘으로!

자신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살아낸 사람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호방한 할아버지는 많이 봤어도 이리도 호방한 할머니 사장님을 참으로 간만에 뵙게 되어 영광이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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