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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친구 삼으니 길이 되어 이 산골로 인도했네 2022-02-15

아픔을 친구 삼으니 길이 되어 이 산골로 인도했네

검태마을 한해숙 씨 이야기 


대부분의 거창한 결심은 작심삼일로 끝나버리기 일쑤지만 나에게는 3년 넘게 유지하고 있는 구체적인 결심이나 습관이 몇 가지 있다. 하루에 만보걷기와 친구들과 함께 하는 책읽기 모임이다. 토요일 오후에는 별일 없으면 네 다섯 명이 모여서 페미니즘 관련 책을 읽는다. 어려워서 혼자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책들을 골라 함께 소리 내어 읽는다. 그렇게 소리를 내다보면 글쓴이의 문장들이 구체적인 생각이나 물음이 되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함께 웃고 떠들고 울었던 시간들 덕분에, 다쳐도 금세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 와중 우리는 어느덧 마흔을 넘거나 그 즈음이 되어갔다. 젊었던 몸이 변해가고 주변의 아픈 이들을 돌봐야 하는 보호자가 되기도 한다.우리들의 구체적인 생각이나 물음은 자연스럽게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질병, 돌봄, 노년에 대한 다른 이야기’라는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입춘이 지났지만 매섭게 추던 날, 땔감 인심 좋은 한해숙 씨의 방바닥은 뜨끈했고 유자차를 나눠 마시며 그의 질병서사를 듣고 있자니 책모임에서 읽고 있는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새벽 세시는 이 변화들이 가장 날카롭게 지각되는 시간이다. 통증의 들쑤심에 속절없이 지새우는 밤의 새벽 세 시를, 쏟아지는 잠을 떨치며 지친 몸으로 아픈 이의 머리맡을 지키는 새벽 세 시를, 나이 들어가며 ‘전 같지 않은’ 몸을 마주하게 되는 새벽 세 시를 떠올려 보라. - 본문 여는 글 중에서』 살기위해 동상면 깊은 산골로 찾아들어왔다는 한해숙 씨(58세). 목발에 의지해 겨우 걸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말하지 않으면 큰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인지 모를 정도로 건강을 되찾아 가고 있다. 48세에 다발성경화증 질환을 앓게 되었고 올해로 10년이 되었다. 숱한 밤 잠 못 이루었을 새벽 세시의 해숙 씨의 몸. 한해숙의 몸은 그 새벽의 아픔을 어떻게 보냈을까.  “옷이 살에 스치지만 해도 고통스러웠고 다리에 힘이 빠져 걸을 수가 없었지. 그래도 혼자 그 모든 시간을 견뎌냈어. 고춧가루를 맨 손으로 막 버무리면 화닥거리잖아. 그렇게 발목이 화닥거려. 그러다가 시리고 아려. 고통 때문에 긴 잠을 못자.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녘에 잠깐 지쳐서 자는 거야.”


몸이 부서져라 일만 했던 시절


해숙 씨는 무주 산골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온 가족이 서울로 이주를 했다. 오빠들, 동생들, 삼촌들까지 대가족이 살다보니 살림을 도맡아 했다. 그 와중에 양장점, 공장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 친구 따라 전주로 내려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서른 중반 무렵 결혼생활을 정리하고 정말 미친 사람처럼 일만 했다고 한다. 친정의 대식구에게 생활비를 보태다 보니 그저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해야만 했다. 큰 병은 늘 신호를 보내온다.


“그 무렵 입병이 낫지를 않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팔이 올라가지 않더니 어느 날 평상시에 불끈 들던 상을 들 수가 없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고 말았지. 동네 정형외과를 갔는데 서둘러 전북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해서 혼자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갔어. 병원에서는 계속 보호자를 찾았는데 나는 혼자였어. 내 스스로가 보호자다고 우기니까 입원시켜줘서 그렇게 홀로 병원생활이 시작된 거지. 혼자 휠체어 타고 대충 씻고 그랬지. 원무과에서 복잡한 입원수속 하는 것도 온전히 내 몫이야. 병원을 하도 많이 다녀서 나중에는 서울, 경기도까지 내가 혼자 버스타고 택시타고 옮겨 다녔어. 진짜 말하고 보니 내가 참 지독한 사람 같아.” 온 몸의 통증보다 두려웠던 것은 하반신 마비로 대소변을 못 가리게 되는 상황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남자가족들에게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못 맡기겠다는 생각 때문에 더 일어나려고 이를 앙 물었다. 기저귀를 차다가 냄새가 심해지면 목발을 짚고 잘 다니던 목욕탕을 찾았다.


“세신사 언니들이 나 많이 씻겨줬지. 그 언니들이 내 다리를 주물러주면서 ‘아이고 해숙아. 니가 어찌 이러냐. 뭣 헌다고 밤낮없이 일만해서 이렇게 몸이 상했냐.’ 하면서 때도 밀면서 내 다리 신경을 더 주물러 줬던 거 같아. 다 친분이 있는 언니들이었어.”



세 식구의 산골 살이


아픔의 세월 속에서 짧게 스쳐가는 고마운 사람들과 급격한 전환을 가져다 줄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다. 자신을 돌보기도 힘든 시절에 친정엄마마저 큰 수술을 하게 되었고 간병할 사람이 없어서 해숙 씨는 엄마 곁을 지키기로 했다. 제대로 걷지 못해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 의지해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는데 그 곳에서 헤어졌던 남편을 우연히 마주쳤다.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한다. 헤어지고 18년 만에 처음 만났던 것이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남편 박종표 씨가 도시생활을 접고 지리산 산골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는 해숙 씨는 불현듯 ‘나도 데려가 달라’는 말을 건넸다. 그를 따라가면 왠지 이 병이 나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혼자가 다시 둘이 되고 셋이 되었던 대전환의 시기였다. 그 무렵 해숙 씨의 조카가 자신의 아이를 키우지 못하는 사정이 생겨 그의 16개월 된 아이, 한결이도 함께 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세 식구의 산골생활이 시작됐다. 지리산에서 1년 정도 살다가 아는 사람 소개로 동상면 검태계곡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올해로 5년이 되어 간다. 처음 마을로 들어오던 해, 집 주변으로 도토리가 많이 떨어져 있었고 무주 산골 살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고 한다. 해숙 씨의 어머니는 도토리를 ‘굴밤’이라고 불렀고 함께 주워서 묵을 쑤곤 했는데 어깨너머 보았던 기억을 되살려 묵을 쒀봤다고 한다. 먹어본 사람들이 맛있어서 팔아보라고  용기를 보태준 덕에 고추, 깨, 콩 농사보다는 도토리묵 파는 재미가 더 좋다고 한다. 예전에 다녔던 병원으로 진찰을 받으러 가면 의사도 놀란다고 한다. 그 당시 함께 치료받던 환자들은 병세가 더 심해져 누워있는데 해숙 씨는 두 발로 걸어서 찾아오니 말이다.






“어차피 이 병은 친구야. 그러니까 밭에서 움직이면 이 고통을 잊어버리게 돼. 내 몸 아프다고 누가 해주기를 기다리면 못 일어났을 거야. 어차피 병이나 아픔은 친구라니까. 살면서 함께 가는 거야. 내 스스로를 돌본 것이 지금 내가 일어날 수 있게 한 힘이 된 거 같아. 나 스스로에게 잘했다고 말해주고 싶어.”
서론에 소개한 책에서는 두려움은 힘이 세다,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려움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해숙 씨는 눕지 않고 앉으려했고 걸으려 했다. 그 간단하지만 단단한 의지가 그를 살게 했다. 봄이 늦게 찾아오는 완주의 검태계곡이지만 한해숙 씨의 얼굴에는 이미 연두빛 봄이 찾아왔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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