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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치타치… 죽을 때까지 드럼과 함께2021-09-17

쿵치타치… 죽을 때까지 드럼과 함께



쿵치타치… 죽을 때까지 드럼과 함께

소향리 드러머, 추경호


추경호(58) 씨를 만나보라며 전해들은 그에 대한 대강의 소개는 이랬다. 나이는 오십 대 중후반, 유튜버, 행사기획자, ()한국연예예술인총연합회 완주지회장, 그리고 드러머. 그중에서도 그가 아주 맹렬한 드럼 연주자라는 말에 호기심이 제대로 발동했다. 기타나 피아노 혹은 섹소폰이나 트럼펫도 아니고 드럼 연주자라니. 나는 여태껏 드럼 연주자를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대학 시절 노래동아리에서 노래 좀 부른다고 송창식, 김광석 같이 생긴 선배들하고는 어울려 다녀봤어도 긴 머리와 몸에 쫙 붙는 가죽바지를 입고 무대 정중앙 맨 뒤에 앉아 밴드를 호령하는 드럼 연주자는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이었다. 비 내리는 8월의 마지막 날, 봉동읍에 있는 필드럼뮤직 스튜디오에서 드러머 추경호씨를 만났다.

 


봉동읍에 위치한 추경호씨의 스튜디오이자 실용음악학원


내 정체성은 드럼이죠. 지금 엄청난 스트레스가 있다고 해도 드럼을 치는 순간 그런 건 다 잊어버려요. 고등학교 때 음악학원 다닐 때는 드럼 악보라는 게 없었어요. 쿵치타치 구전으로 배우는 거지. 무슨 호텔 나이트클럽에 어떤 형이 드럼을 잘 친다, 그러면 무작정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옆에서 드럼 치는 걸 보는 거예요. 그걸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독학으로 공부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드럼 악보를 직접 그렸어요. 그 뒤로도 드럼교재가 참 부족했어요. 일본 것 카피해서 돌려쓰고 했죠. 그래서 제가 본격적으로 드럼 악보를 만들어서 홈페이지에 올려서 팔기도 했어요. 2010년에서 2015년에는 온라인상으로 활동을 활발하게 했어요. 네이버 카페에 필드럼이라고 치면 지금도 제법 유명해요.”

 

다시 돌아온 내 고향 소향리

고산면 소향리가 고향인 추경호씨는 그동안 고향을 두 번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더 넓은 세상의 음악을 배우기 위해 서울로 떠났다. 93년 장사하시던 아버님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다시 고향에 내려와 집안일을 돕고 결혼도 했지만 음악에 대한 미련은 그를 다시 서울로 향하게 했다. 1996년부터 2017년까지 20년 넘게 서울에서 음악활동을 했지만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그에게 음악의 영혼을 불어넣었던 대아리저수지 아래 푸근한 고향마을은 그를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게 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아내 현숙씨도 더 늦기 전에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을 보탰다.

 


고산동초등학교 졸업사진을 보고 있는 추경호씨



고등학교때부터 독학으로 음계공부를 해서 직접 드럼악보교재를 만들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밴드를 만들었죠. 밴드 이름은 <야생마>였어요. 학교 졸업하고 서울 가서도 음악을 계속했지요. 그 당시 흔하던 나이트클럽, 스탠드바, 카바레 같은 데서 라이브로 연주를 했지요. 군대도 드럼전공으로 시험 봐서 군악대를 갔어요. 제대하고 고향에서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음악을 못 접겠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서울로 올라갔죠. 서울, 광주, 부산 떠돌아다니며 밤무대 밴드 활동을 한 거죠. 서울에서 93년도까지 있다가 그 당시 아버지가 식당을 운영하시다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제가 장남이다 보니까 어머니 혼자 계시도록 놔둘 순 없으니 고향으로 다시 내려온 거죠. 고향 내려와서 결혼도 했어요. 그 당시 서울에서 연애하던 친구였죠. 서울 여자를 시골 촌구석으로 데려온 거니까 아내 집안에서 반대도 심했죠. 그렇게 한 3년인가 여기서 살았어요. 그런데 못하겠더라고요. 서울로 올라갔죠. 서울 미아리에서 실용음악학원을 운영했어요. 1996년부터 2017년까지. 그리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 거예요. 음악을 여전히 좋아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점점 시골에서 살고 싶더라고요.”


대아리 저수지에 놀러온 사람들의 기타선율에 귀가 트이다

그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중반 서울의 대학로 시절을 낭만적이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시간들로 기억했다. 그림 그리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춤추는 사람, 프로와 아마추어들이 길거리에서 함께 어우러졌고, 저녁이면 골목 음식점마다 사람들로 넘쳐났던 호시절이었다고 한다. 문득 고산 대아리저수지 아래 시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어쩌다가 음악을 좋아하게 됐고 고등학교 시절엔 당시 흔치 않던 밴드까지 만들게 됐는지 궁금했다.

 

제 고향 대아리가 저 어렸을 때는 유명한 관광지였어요. 그 당시 여름이면 전주에서 버스가 하루에 한 20대 정도가 들어왔어요. 늘 외지 사람들이 많이 있었죠. 여름 방학 때는 별 뜨고 깜깜해지면 매일 냇가로 모이는 거죠. 펑키타운, 원나잇티켓, 산울림, 조용필, 윤수일 밴드 그런 음악들을 들으면서 놀았어요. 듣기만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도 밴드 하나 만들자. 여차저차 해서 동네 애들이 토요일 학교 끝나고 버스 타고 전주로 나가서 코리아극장 사거리에 있던 전북음악학원에 등록을 했지요. 그것이 우리 음악의 시작이었어요. 어렸을 때 생각해보면 고산 6개면 지역에서 유난히 대아리 쪽 애들이 음악적으로나 예능적으로 강했어요. 이유가 뭐였을까 생각해보면 마을에 유원지가 있었잖아요. 동네로 놀러 오는 외지사람들이 죄다 기타를 가지고 왔었어요. 냇가에서 기타치고 노래 부르고 노는 걸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거죠.”

 


<야생마>는 고등학생들이 만든 밴드였지만 실력이 제법 좋아서 연말에는 여기저기 행사장에도 많이 불려갔다고 한다. 당시에는 연습할 곳도 마땅치 않아서 방학이면 대둔산이나 운일암반일암으로 합숙훈련을 갔고, 드럼이 없으니 코펠과 그릇을 있는 대로 꺼내서 뒤집어 놓고 연주를 했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여고생들에게도 인기가 좋았었다고 추억하는 대목에서는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몇몇 장면들이 떠올랐다.

근데 며칠 전에 기가 막히게 밴드 같이 했던 동생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지금은 안양에 사는데 고향이 여기니까 한 달에 한 번씩 꼭 와요. 그 친구도 고등학교 시절 계곡에서 기타치고 놀던 시절이 생각났나 봐요. 동상면에 아는 카페에 갑자기 모여서 즉석공연을 했어요. 후배가 기타치고 나는 상 두드리고. 그리고 밴드 활동하던 시절에 우리가 조직하고 기획해서 지역콩쿨대회를 만들었어요. 이름은 소향리 콩쿨대회쉽게 말해서 시골 노래자랑이었죠. 추석날 저녁에 마을 초등학교(고산 동초) 운동장에서 했는데 그 당시에 고산면이 들썩들썩 했어요. 서울에서 공장 다니던 젊은이들이 고향 내려와서 서로 안부도 묻고 돼지도 잡고.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정말 주민들이 주인공이 되는 축제였지요. 코로나 때문에 못하고 있지만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꼭 옛날의 그 축제를 복원시키고 싶어요.”

 

작년부터 지역의 공연, 행사가 취소되면서 추경호씨의 주업인 이벤트 사업이 힘든 상황이다. 그저 버티고 있을 뿐이다. ‘국수집이나 차려볼까라는 말을 흘렸다가 아내 현숙씨에게 혼이 났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좋아하는 음악 계속 해야지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는 그 말이 경호씨를 살게 한다. 곧 다가올 추석날 밤의 보름달을 생각한다. 소향리 콩쿨대회가 열렸던 그 밤, 시골 골짜기 운동장까지 찾아온 사람들이 뿜어대는 열기. 추경호씨의 말이 어찌나 생생한지 쿵치타치 드럼박자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내년 추석에는 보름달이 환하게 뜰 것이고 기어코 그 운동장으로 가볼 테다. 다시 모인 소향리 야생마의 완전체를 두 눈으로 보고 싶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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