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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상한 일 뒤로 하고 태평가로 놀아보세2021-01-30

속상한 일 뒤로 하고 태평가로 놀아보세

속상한 일 뒤로 하고 태평가로 놀아보세

용진읍 용암마을 강춘자


강춘자 할머니가 장구 잘 친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자자했다. 그저 사진 한번 찍어보려고 장구 앞에서 자세를 취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진 찍는 것이 영 어색했던지 춘자할머니는 눈을 질끈 감고 에라 모르겠다, 장구채로 궁따궁따 장단을 치기 시작했다. 나도 사진을 몇 장 찍다가 에라 모르겠다, 즉석 공연을 감상했다. 곧이어 익숙한 가락이 흘러 나왔다.

내가 평소에 자주 흥얼거리던 곡조였다. 내 자신이 짜증날 때 그 감정을 달래기 위한 읊조림이기도 했고, 친구가 짜증을 낼 때 위로 반 놀림 반으로 흥얼거리던 곡조였다.

    

19살의 강춘자와 81살의 강춘자

 

짜증은 내여서 무엇하나 성화는 받치어 무엇하나 속상한 일도 하도 많으니 놀기도 하면서 살아가세 니나노 닐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 얼싸 좋아 얼씨구나 좋다~”

 

태평가의 한 대목이다. 강춘자(41년생)할머니는 코로나로 인해 외부활동을 못하게 되었지만 슬기롭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마당과 인근 밭에서 키우고 있는 삼백여마리의 병아리를 보살피는 일, 오랜 친구들과 전화통화하며 서로 안부 전하는 일, 그리고 층간소음 걱정 없이 장구를 치고 민요를 부르는 일이다. 무아지경이 되어 장구치고 노래 부르는 것은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있던 고통을 풀어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지금의 화사하고 낙천적인 웃음 속에서 고통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다.

    

16살 초포다리근처 과수원에서 일하던 시절(오른쪽 강춘자)

 

영감 죽고 아이들 다 여의고 내 인생 이렇게 답답하게 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때부터 열심히 놀고 배웠지. 그러니까 내 몸이 버틴 거야. 내가 속으로 끓이면서 복작거리고 살았더라면 내 몸이 건강하덜 못해. 마음에 담아 놓는 법이 없어. 어디 놀러 가면 노는 데는 1등이야. 막 풀어내고 살았어. 그래서 내 몸이 아직도 성하지 싶어.”

 

속상한 일이 하도 많았던 시절

춘자 할머니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오래된 사진 한 장과 어머니에게서 전해들은 몇 가지 이야기뿐이다. 아홉 형제의 둘째로 태어나 먹고 사는 일이 팍팍했던 시절, 일본인이 운영하던 포목점에서 일을 해 대식구의 가장 노릇을 했고 그마저도 녹녹치 않아 이제 막 결혼 한 새 신부 떼어 놓고 중국 만주로 돈 벌러 가셨다고 한다. 장사수완이 좋고 야무진 아버지였다. 만주에서 돌아와 1941년에 10월에 춘자할머니가 태어났다. 그해를 넘기고 꽃피는 3월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부터 3월이 되면 엄마를 도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제사상을 차렸다.

 

우리 엄마가 얼마나 고생을 했것어. 혼자 애 키우기 힘든 시절이었지. 5살 때 재혼을 하셨는데 그때 나를 데리고 그 집으로 들어갔지.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기 전에는 돈 잘 벌었으니까 농짱이랑 좋은 것 사서 살았었나봐. 중인리로 재혼 갈 때 그 농짱을 구루마에 싣고 걸어갔어. 그때부터 내가 고생하며 살아서 그런지 그때가 선명하게 기억이나. 엄마만 꼭 잡고 따라 갔어. 의지할 사람이 엄마뿐이잖아. 그런데 재혼으로 간 그 집도 정말 잘 못 간 거야. 갔더니 술에 쩔어 가지고는 이미 같이 살고 있는 여자도 있더라고. 거기서 삼일 있다가 친 할머니가 나를 데리러 왔더라고. 그때 기억이 선명해. ‘엄마 엄마 내일 모레 나를 꼭 찾으러 와야해.’ 그 말이.. 지금도 어느 영화 장면 하나를 보는 것처럼 선명해.”

할머니 손에 이끌려 엄마랑 헤어지던 다섯 살의 그 아이를 떠올리며 잠시 다독거린다. 그 다독거림이 전해질 리 없지만 지금의 춘자할머니의 눈을 바라보며 금세 차오른 눈물을 바라보다 함께 울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수완 좋고 야무진 내 기질이 아버지를 닮은 모양이야

전주 호성동에서 아버지 형제들과 그들의 자식들과 뒤섞여 한 번도 울지 않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학교를 다니다가 전쟁을 겪고 뒤늦게 다시 다녔지만 어린 사촌동생들 업고 학교를 다녔으니 공부를 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옆집에 사는 동갑내기 친구가 만화책으로 글을 알려줘서 그때 한글을 깨우쳤다고 한다. 중학교도 1년 다니다가 학비를 대주는 사람이 없어 16살에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춘자할머니는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삶을 개척하고 수완이 좋은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강춘자씨는 오로지 이 사진으로만 아버지를 기억하고 있다 


초포다리 근처에 과수원이 많았어. 거기서 하루 품삯을 5원씩 받아가면서 일을 시작 한 거야. 돈을 조금씩 모아서 그걸로 황소 송아지를 샀어. 주변에 소문을 냈지. 나 일할 때 소개 좀 해 달라고. 전주 코아백화점 자리에 일본사람이 운영하던 제사공장(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내는 공장)이 크게 있었어. 17살 무렵에 거기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 거야. 그때 참 예뻐서 주변에서 미스코리아 나가보라는 이야기도 많이 들었지. 그 공장이 불이 나는 바람에 동양제사에서 1년 일하고 그 뒤로 개인 공장에서도 일을 했지. 누에에서 실 뽑는 기술로 계속 일을 한 거지. 연탄불 피워서 양은대야 올려서 물을 끓여. 누에고치를 끓는 물에 삶아. 그럼 거기에서 실이 한 올씩 올라와 그걸 하나로 엮어 뽑아서 그 실을 물레에 감는 거지.”

    


24살이 되던 해 결혼식 사진


24살에 용진 용암마을로 시집와서 사남매를 낳고 키우면서도 논일 밭일 해주며 품삯을 벌고 그 돈으로 쌀 계를 해서 목돈을 모으고 마을 입구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면서 아이들 학교 졸업시켰다. 딱 십년 가게 운영을 하고 장사를 접었다고 한다. 남편의 과음이 심해져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란다. 50대 중반 무렵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전세방을 얻고 1년 동안 안 다닌 곳 없이 실컷 서울구경을 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왔다. 몇 년 뒤 59세 나이로 남편 황동연씨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춘자할머니 57세 되는 해였다. 슬픔 속에 파묻혀 지낼 수는 없었다. 이제 비로소 내 인생 자유롭게 살아 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서울에서 잠시 살던 시절 큰 아들 부부와 함께


내가 평생 남 눈치만 보고 살다가 다 늙어서는 즐겁게만 살았어. 전주에서 병원, 아파트 청소일 하면서 돈도 벌고 사교댄스도 배우고 국악원도 한 5년을 다녔어. 국악원에서 타악기랑 춤이랑 민요를 배웠지. 안 다녀 본 데 없이 공연도 다녔어. 그 뒤로 노인복지원에서 컴퓨터, 수영도 배우고 그랬지. 산악회 활동도 하고 낚시도 다니고 캠핑도 하고 그랬지. 일흔 살까지는 실컷 놀았어. 그 무렵에 집이 낡아서 고쳐야 했는데 그냥 집을 다 허물로 새로 지은거지. 6천 들어서 집 지었어. 내가 번 돈으로 집을 지은거지. 나는 살면서 남한테 손 내밀어 본 적 한 번도 없어. 내가 벌어먹고 살았지.”

    

남편 황동연씨가 먼저 돌아가시고 혼자가 된 강춘자씨는 그동안 못했던 세상여행을 시작했다


 

소일거리 삼아 마당에서 닭, 기러기, 원앙 온갖 조류를 키우고 있다


혼자 살아도 괜찮다고, 오히려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 좋은 것 아니냐며 나를 위로해주는 할머니는 강춘자 할머니가 처음이었다.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뭐냐고 물으니 대한민국에서 내가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일이라고 한다. 속상한 일 잠시 뒤로 하고 놀기도 하면서 올해를 살아갑시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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