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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 평생 살다보니 내가 참 사랑스러워2019-06-05

칠십 평생 살다보니 내가 참 사랑스러워


칠십 평생 살다보니 내가 참 사랑스러워

-완주군 봉동읍 둔산리 김기순 할머니

 

1년 중 낮이 가장 긴 날이라는 하지(夏至) 가 곧 다가 온다. 여름 더위가 시작되는 날인 소서(小暑)는 한 달 뒤이다. 24절기의 흐름대로 계절이 오고 가면 좋으련만 갈수록 더위는 일찍 찾아온다.

몇 주 전 시장을 보고 횡단보도 앞에 서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정오 전인데도 불볕더위로 숨이 막히는 이상한 날이었다.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며 뜨거운 해 아래 서있으려던 찰라 옆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 두 분이 말을 걸어오신다. 왜 그 햇빛에 서 있느냐, 이 안으로 들어오라고. 할머니의 빛바랜 파라솔이 만들어낸 넓은 그늘이 그 안이었다. 나물 사라는 말도 아니었고 그늘 안으로 들어와 시원하게 있다가 불 바뀌면 후다닥 뛰어가라신다.

그늘 안으로 쏙 들어가 할머니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었다. 하루 종일 할머니가 만든 그늘 안에 앉아 그들의 차고 넘치는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5월 넷째 주에는 작정하고 이야기를 듣겠다며 판을 벌였다. 문화다양성 주간행사로 완주문화다양성 영화제 되어보는 영화제가 열렸다. 완주문화재단과 완주미디어센터가 기획하고 진행한 일이다. 영화는 휴 시네마에서 상영이 되었고 나는 근로자종합복지관 앞 광장에 천막을 펼치고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라는 이야기 부스를 운영했다.

영화가 별 거 있나. 내가 살아온 인생이 영화지!” 평소에 어르신들 인터뷰하면서 가장 많이 듣던 말이다. 매운 시집살이, 외로운 타향살이, 먹고 사느라 좋은 시절 다 지나갔다고 느끼는 이들, 잠시 멈춰서 내 인생을 돌아보고 싶은 이들. 평범하고 비슷한 듯 보이지만 저마다 다른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피구왕이 되고 싶은 초등학생의 고민, 고등학교 진학대신 스스로 삶을 만들어 가고 싶은 소년과의 오랜 대화. 아기 키우느라 영화 볼 틈이 없는 엄마. 수줍은 젊은 농부. 그리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지쳐갈 무렵 내가 만든 그늘 속으로 쏙 들어온 이가 있었다. 흰 머리와 검은 머리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고 눈은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수영을 마치고 나오신 김기순(75) 할머니다. ‘내가 고생한 이야기 하면 책 한권은 거뜬히 쓰겠네.’ 라는 표지판에 쓰인 문구를 유심히 보시더니

 내가 고생한 이야기 하면 책 한권이 뭐야, 스무 권은 거뜬히 쓰지.”

그렇게 첫 만남 이후로 김기순 할머니와 두 번의 만남이 있었다.


 


사진 위에서부터 되어보는 영화제 이야기부스에서 김기순할머니와의 첫 만남, 둔산영어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선생님과 대화중인 김기순 할머니, 남편 전경석 어르신과 함께.



평생을 사람 보살피는 일을 하며 살았네

할머니의 고향은 익산시 용안면의 너른 평야다. 젓갈로 유명한 강경의 아랫동네다. 김기순 할머니의 아버지는 6.25 전쟁 통에 고향 서울을 떠나 외가댁 용안으로 피난을 왔다가 논농사 일을 배우며 그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수완이 좋아 농사지은 쌀을 트럭에 싣고 서울로 올라가 좋은 가격에 팔았다. 서울 갔다 온 날이면 늘 허리춤에 돈 뭉치가 그득했다고 한다. 워낙 쌀이 풍족해 굶을 일은 없었지만 돈을 벌기만 했지 쓰지를 않는 탓에 가족들이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아들만 있는 집에 첫째 딸로 태어나 아래로 어린 동생들 키우다 시피 돌봤다. 부모님 곁에서 16살부터 25살 까지 논농사, 보리농사 짓느라 사계절을 일과 함께 보냈다. 25살 무렵에는 아버지에게 파업을 선언하셨다고 한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밤낮없이 일을 하는데 월급도 못 받는 것이 서럽기도 하고 이러다가 친정에서 평생 일만 하다 세월 다 보낼 것만 같았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뒤 친정 어르신들의 신중한 중매로 혼인이 이루어졌다.

 

시댁이 교육자 집안이었기도 했고, 시집와서 풍부하니까 내가 친정을 잊어버리고 살았어. 가지도 않고. 그때는 걸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 애들 데리고. 친정을 전혀 못가고 살았지. 우리 엄마가 언제가 굉장히 서운하게 생각하더라고. 딸 하나 있는 것이 얼굴 보기 힘들다고.”

 

먹고 살 걱정 없이 풍족하게 살았으나 맏며느리라는 중압감과 열 명이나 되는 시동생을 돌보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친정에서도 동생들을 돌봤는데 시집와서도 시동생들 돌보며 5년을 살았다. 그 후로 초등학교 교사인 남편 전경석 어르신의 발령으로 정읍, 여산, 함열에서 2~3년 씩 살며 익산에서 35년을 살았고 그 곳에서 정년퇴임 하셨다. 할아버지의 일에도 정년퇴임이 있듯이 할머니 역시 나름의 정년퇴임을 치렀다.

 

“60대 초반까지 손주들을 10년 간 돌봐줬는데 이제 다 컸고 내 일도 끝났지. 나도 늙고 시어머니도 늙고서는 시어머니가 그려. 내가 너한테 참 미안했다고.”


 



나답게 사는 것에 대해

10년 전, 퇴임 후의 삶을 위해 이곳 둔산리 아파트에 정착하셨다.

 

처음에는 지나가는 사람들끼리 인사하는 것이 제일 부럽더라고. 나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데 언제나 저렇게 인사를 할까 그랬는데, 지금은 아는 사람 천지야. 복지관, 수영장, 영어도서관, 운동장. 내가 거기를 제일 많이 가는데 가는 곳 마다 아는 사람이랑 인사하며 지내네. 수영장에 한 번 들어가면 3~4시간씩 있다 나와. 수영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랑 이야기 하느라고. 젊은 사람들이 나한테 많이 와. 자기 고민 이야기도 하고 나는 들어주고.”

 

김기순 할머니와 함께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계속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내 속의 말을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기운이 있는 분이다. 자녀분들과도 매일 통화하며 마음 맞는 친구처럼 지낸다고 하신다. 이제는 자신을 위해 산책하고 배우고 즐기고 싶다고 하신다. 집안일에 매어 있느라 바깥 구경 못할 시절에는 주로 책을 읽으셨다고 한다. 박경리의 토지, 최명희의 혼불, 김윤희의 잃어버린 너. 할머니가 좋아하는 책들이다.

 

속이 상할 때마다 썼던 글이 몇 권이 되더라고. 지금도 매일같이 써. 사소한 일들을 쓰는 거지. 발표할 정도로 잘 쓴 글은 아니지. 나는 그냥 속을 풀면 되니까. 그렇게 글 쓰고 나면 마음이 참 후련해져. 지금 와서 내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사랑한다고. 내가 나를 많이 사랑한다고학창시절에 나는 내 외모에 자신이 없었어. 나는 왜 못생겼을까.. 내가 봐도 내 자신이 뚱뚱하고. 하지만 이 세상에 나는 하나밖에 없는 거거든. 내가 나를 사랑해야지. 내가 나를 끝까지 사랑해야지. 내가 어디가 또 있겠어. 한 사람이잖아. 뚱뚱하면 뚱뚱한데로 안 예쁘면 그런대로 나를 사랑하는 거지. 칠십이 돼서야 그 사실을 알았어.”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나답게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부정하고 남과 비교하며 허덕이기도 한다. 70년이라는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 김기순 할머니의 편안해진 얼굴을 보며 모두에게 그 깨달음이 빨리 찾아오기를.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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