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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오래된 집 1부: 할머니의 유년시절 이야기2019-03-04

할머니의 오래된 집 1부: 할머니의 유년시절 이야기

할머니 집은 빙 둘러 제법 넓은 밭이 있다. 집 앞마당에는 마늘, 양파, 배추 등 김칫거리를 심고 계단을 올라 대숲이 둘러싼 밭에는 들깨, 참깨, 감자, 시금치, 고추를 심는다. 집과 한몸처럼 어우러진 할머니는 봄 준비가 한창이다.


할머니의 오래된 집

1부 할머니의 유년시절 이야기


-이서 갈동마을 김양금 할머니

 

살림하는가?”

김양금 할머니는 대뜸 나에게 물었다. 어르신들을 만나면 보통은 시집은 갔는가라고 묻지만 할머니의 질문은 신선했다. 부모님 집에서 나와 내 살림을 십년 넘게 꾸려오고 있기 때문에

. 살림합니다.” 라고 답했다.

 

해는 길어졌지만 바람 끝은 여전히 차다. 한참을 밭에 앉아 무얼 하시나 했더니 한 소쿠리 캐온 시금치를 봉지에 꾹꾹 담아 내 손에 들려주신다.

삶아서 마늘 갈아 넣고 간장으로 간해서 참지름 둘러서 무쳐 먹어봐.”


아궁이가 건재한 부엌



할머니의 농사도구와 고무신


머니 집을 빙 둘러 제법 넓은 밭이 있다. 집 앞마당에는 마늘, 양파, 배추 등 김칫거리를 심고 계단을 올라 대숲이 둘러싼 밭에는 들깨, 참깨, 감자, 시금치, 고추 등 심는다고 하신다. 7년 전까지는 쌀농사도 혼자 지으셨는데 이제 쉬엄쉬엄 밭농사만 짓는다고 하신다. 쉬엄쉬엄이 이 정도다.

 

집은 이렇게 생겨먹었어도 땅은 있으니까. 아프고 나서는 논농사는 못 지어먹어. 전에는 논농사 지어서 애들 쌀 보내주고 그랬지. 밭농사는 안 놓았어. 작년에 입원하느라 1년 묵혔지 그 뒤로는 다시 밭농사 짓지. 자식들 줄려고 짓는 농사지. 나 혼자 먹을 라고는 안 짓지. 애들 먹이려고. 김장할 때는 애들이 인천에서 다 내려와.”


김양금 할머니가 캔 시금치



집보다 높아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텃밭에서 시금치를 캐 내려오는 할머니


김양금 할머니는 1939년 김제 검산리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이서면 갈동마을(할머니 시집오실 당시에는 치릇마을이라고 불렀다.) 이대독자 손 귀한 집으로 시집오셨다. 육남매를 낳고 서른일곱에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마흔 일곱에는 첫째 딸에게 아이들 맡겨두고 혼자 인천으로 돈 벌러 떠났다. 자식들 장성해서 시집 장가보내고 살길 찾아갔다는 생각이 드니 예순다섯 무렵, 혼자 이 마을로 돌아왔다. 스무 해 가까이 버려져 있던 집은 댓돌 앞까지 대숲으로 꽉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다섯 달 동안 매일 낫과 톱을 들고 혼자 힘으로 대나무를 잘라내고 모아서 불태웠다. 땅을 북돋아 밭을 만들었다. 식어있던 아궁이에 불을 넣었다. 아이들 키우며 살던 그 집. 족히 이백년은 되었다는 그 집에서 김양금 할머니의 살림은 다시 시작된다.

오래된 흙집과 자신이 일군 땅에 대한 이야기를 하실 때 할머니의 형형하던 눈빛이 생각난다. 오래된 집 마루에 앉아, 밭에서 함께 쪼그리고 앉아 들었던 할머니의 오래 묵혀 둔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집앞에 선 김양금 할머니


온 동네 사람들이 뽕밭에서 일을 했지

할머니 나이 7살에 해방이 돼서 온 동네 사람들이 김제역으로 몰려나와 태극기를 흔들었다고 한다. 할머니 살던 검산리는 600가구 넘게 사는 제법 큰 동네였다. 해방되기 전 이 마을에는 일본인 가구 수가 5~6가구 정도였고 대규모 과수원이나 거대한 잠종장을 운영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기억이 어렴풋이 나. 우리 동네에 일본사람이 겁나게 살았어. 우리 친정엄마가 일본 사람네 누에 키우는 거 일하러 갈 때 나도 따라가서 일본사람 아기 돌봐주기도 했어. 애기가 애기를 돌 본거지. 일본사람들 기모노 옷이 기억이 나. 뒤에 보따리 같은 것이(오비) 달려있지. 일본 사람들 뽕밭이 겁나게 크게 있었어. 그러니까 우리 동네사람들이 거기서 일을 많이 했지. 아저씨들이 오두개 열렸다고 우리 꼬마들보고 따먹으라고 알려줬어. 아저씨들은 뽕나무 쳐서 지게에 지고 가서 부려놓으면 여자들은 갈무리해서 누에 밥으로 주고. 참 큰 창고(잠종장)였어.”

 

다섯 살 무렵 뽕밭에서 놀던 그 시절이 왜 그리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을까. 오두개가 참 달아서 였을까. 어머니의 누런 무명옷만 보다가 화려한 기모노의 색깔이 고와 보여서 였을까.

오두개 먹고 입가가 까매졌을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본다.

 

간호장교가 되었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14살 되던 해에 6.25전쟁이 터지고 18살에 전쟁이 끝났다. 친한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되고 싶은 사람, 닮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된다.


 

여자의용군 교육대 발족(출처 전쟁기념관)

 

친구 집에 참 멋있는 군인이 하나 와있네. 친구한테 물어봤더니 이모 딸이랴. 그때 군인들 통합병원이 광주에 있었어. 전쟁 끝나고 바로니까 환자들이 얼마나 많았겠어. 그 시절에 간호장교였던 가봐. 광주가기 전에 이모 집에 잠깐 들른 거지. 그때 그 언니가 입고 있던 군복을 보고 반한거야. 누리끼리한 군복이었는데 그 놈을 쫙 데려서 모자까지 갖춰 입었는데 왜 이리 멋있게 보여. 그 다음에 친구를 만나봐서 물어보라고 그랬어. 어떻게 하면 그 언니처럼 간호장교가 되는지.. 김제 어디 면사무소를 찾아가면 임시 시험 보는 곳이 있다고 가르쳐줘서 친구랑 나랑 거기를 찾아서 갔지. 나도 옛날 사람이었지만 키도 클 만큼 크고 얼굴도 누구한테 안 빠지고 그랬어. 체격도 쫙 빠지고 좋았지... 신체조건, 학벌 이런 것을 본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랑 같이 손잡고 찾아간 거지. 그때는 면접인지 뭔지도 몰랐지. 신체조건은 다 합격했다고 그려. 우리보고. 그런데 그 사람 말이 고졸 이상어야 합격을 한데. 근데 전쟁 통에 어찌 학교를 다녔겄어. 말 잘하는 내 친구가 물어보더라고. 어째서 고졸이상어야 하냐고.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시대 보냈지, 전쟁 보냈지. 약 같은 것이 우리나라에는 별로 없지. 다 외국에서 수입을 하니까 영어로 된 약 이름을 알아야 한데.. 누가 뭘 가져오라면 영어보고 가져오고 그래야지.. 가하고 나하고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오면서 어느니 그러것다. 우리나라에서 난리만 치고 약 만들 그런 것이 없었겠다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가 해당이 안 된다니까.그 시절에 내가 장교가 되었더라면 인생이 뒤바뀌었겠지.”

 

인터넷을 뒤적거려 그 시절 여자의용대 사진을 찾아내 할머니에게 보여드렸다. 한참을 바라보시고, 한참 혼잣말을 하신다. 인생이 많이 뒤바뀌었을 텐데. 나라가 엉망이었지. 그 시절은.

터덜터덜 집으로 가는 먼 길을 걸어갔을 18살 소녀의 뒷모습. 2년 뒤 이모의 소개로 트럭타고 이서면 치릇골(현재 갈동마을)로 시집온 김양금 할머니. 그의 첫 번째 살림이 시작된다.

 

집으로 돌아와 오랜만에 집을 돌보며 살림을 한다. 할머니가 주신 시금치를 삶아 나물을 무쳐낸다. 할머니의 황토 빛 밭에서 겨울바람 이겨낸 시금치 맛이 달큰하고 애틋하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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