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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낙평리 해지는 풍경이 참 좋았어 2018-09-03

그래도 낙평리 해지는 풍경이 참 좋았어

그래도 낙평리 해지는 풍경이 참 좋았어

봉동 낙평리 신월마을 도상기 어르신


살던 고향 물에 묻고 18년 훌쩍


매년 8월30일은 신월마을 탄생일

수몰민+주민들 모여 밥 한 끼 나누며 이야기꽃


사람은 태어날 때도 중요하지만 생을 마감하는 곳도 중요해,

내 역사의 중요한 대목이니.

다 늙은 타향살이는 어려운 일 그래선지 그리움 더 사무쳐

 


고향이라는 말은 아련하다. 사전을 들춰보면 태어나서 자라고 살아온 곳 그래서 마음속 깊이 그리운 곳이 고향이라고 그 의미를 가르쳐주지만 고향의 의미를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다. 떠나온 사람들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라는 노랫말처럼 꿈속에서도 잊을 수 없는 그런 곳일지도 모르겠다.


 

진안 상전면 월포리 고향사진



내 고향은 진안군 상전면 월포리여. 90세대 정도 되는 큰 마을이었고 월포리하고 원월포리에서 열 네 집이 이곳으로 왔고 이웃마을에 열 세 집이 같이 와서 스물일곱 집이 여기로 왔어. 용담댐 건설이 국가공익사업이지만 사는 주민들을 떠나보내려면 에로사항이 많았을 거야. 수몰예정지 주민들은 7~8년을 반대 운동을 했지. 우린 못 나간다고 투쟁을 한 거야. 반대하는 과정에서 진안 문화원에서 집단으로 함께 거주하기도 하고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길게 투쟁한 곳은 아마 없을 거야. 그런 과정을 거쳤지. 하지만 용담댐이 결국 막아지고 우리가 체념할 수밖에 없었어.”

 

봉동읍 낙평리 신월마을은 용담댐 수몰지역에서 이주해온 주민들이 새 터를 잡고 만든 마을이다. 18년 전 이곳으로 이주해 오신 도상기(76) 어르신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고 담담하게 그때 일을 말씀해주셨다.

 

용담댐 생기기 전만 해도 전주가 조금만 비 안 오면 단수되고 그랬지. 높은 지대는 끄떡하면 단수되고 상수도 에로사항이 많았어. 대아저수지 것 끌어다 쓰고 상관 옆에 있는 조그만 저수지 물 끌어다 쓰고 그랬지. 완주 3공단, 익산공업단지는 물이 없어서 그때만 해도 생기질 못했지. 전라북도 발전 차원에서 여러 가지로 우리가 고향을 물에 묻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그래도 우리 고향을 묻고 애환은 애환대로 대의를 위해서 우리가 희생하지고 모두 결정을 했지.”

 

오십대 후반에 고향을 떠나와 지금은 칠십대 중반이 됐지만 어르신은 고향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월마을이라는 이름도 고향의 이름을 따다 지으셨다고 한다. 월포에서 달월() 자를 따오고 새로운 신()을 붙여서 신월(新月) 마을이라는 이름을 지으셨는데 정초에 새로이 뜨는 달도 신월이라고 한다고 하니 마을 이름이 참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8월 30일. 진안에서 이주해온지 18년되는 날, 마을 주민들이 모여 마을 생일잔치상을 나눈다.



“20003월부터 집을 짓기 시작해서 그해 8월에 완전히 이주를 했지. 그래서 그 뒤로 830일을 마을 탄생일로 정했어. 18주년 마을 탄생 기념행사를 하는 거지. 특별나게 무슨 행사를 하는 것은 아니고 밥 한 끼 모다 모여서 먹는 거지. 지금은 이 마을에 수몰민들만 사는 것은 아니니까 동네 주민들이 모여서 얼굴보고 밥 먹는 거지. 수몰민과 주민들이 함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도 하고. 18년 세월이 지나다보니까 수몰민들은 제일 젊은 세대가 65세 정도가 제일 젊은 세대야. 제일 연세가 많으신 분이 올해 90세지.”

 

수몰민이라는 말은 그것이 뜻하는 의미와 관계없이 편을 가르는 말이다. 외지인, 이주민, 새터민, 실향민처럼 뜻하지 않게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그리워 할 꿈엔들 잊을 수 없는 고향을 생각한다면 그런 말들은 함부로 쓰여 지지 않길 바란다. 더군다나 물속에 잠겨버려 더 이상 가 볼 수도 만져볼 수도 없는 고향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 말은 상처가 되는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 티브이 보면 이북 실향민들 나오잖아요. 그분들은 당장 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기 고향이 있잖아. 통일이 되면 그곳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잖아, 그런데 우리는 완전히 물속에 잠겨서 없어. 흔적이 없어. 우리는 어찌 보면 실향민이지만 고향이라는 곳 그 자체를 가볼 수가 없게 됐어. 그래서 내가 그 노래를 잘 불러.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내가 살던 고향을 물에 묻고 여기 와서 사는 거지. 나이를 먹으니까 그런 애환이 가슴에 사무치네. 아무래도 타향에 산다는 것은 고향에서 살 때랑은 아주 다른 것이지. 그런 마음을 알랑가 몰라. 고향에서 60년을 살다가 다 늙어서 타향살이를 하는 것은 참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야.“

 

낙평리에서 만경강 저 편으로 해지는 풍경이 참 좋았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60년을 살아오셨던 고향마을을 언제까지나 잊을 수는 없으시겠지만 지금 살고 계시는 신월마을에서 해질녘 벌겋게 물드는 서쪽하늘을 벗 삼아 또 하나의 고향을 만들어 나가시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어르신이 좋아하신다는 이 노래의 제목이 고향무정(故鄕無情)’ 이라니 그리워하는 것은 사람들이고 그저 고향은 무정하게도 마음속에만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도 생각해 봤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있네....

 

집 앞의 문전옥답



사람 사는 것이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찌하여 용담댐이 생겨서 내 고향이 물에 잠기고 아무 연고도 없는 완주 봉동에 정착하게 되었을까. 이제 여기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낳는 출생지도 중요하지만 생을 마감하는 곳도 중요한 거야. 태어날 때도 중요하지만 인생을 마감하는 것도 중요해. 내 역사의 중요한 대목이지. 낙평리로 오니까 해지는 풍경이 참 좋데. 진안 산골 살적에는 해가 산으로 금방 숨어버리는데. 여기 와서 나는 해가 그렇게 큰지 몰랐네. 빨간 해가 넓은 평야로 천천히 지는 게 한 눈에 보이잖아. 그 풍경은 참 장관이야.”


 

낙평리 신월마을 산책중인 도상기-김성자 부부



평생을 산골에서 살다가 이제는 두 번째 고향이 생겼다. 구름이 울고 넘는 저 산은 아니지만 지는 해가 쉬어가는 너른 들판이 있다. 기름진 문전옥답은 아니지만 넓은 텃밭도 있다. 양파, 마늘, , 참깨 걷어 들이고 이제는 육남매 나눠먹을 김치를 위해 배추 모종을 심는다. 평생 해오던 일은 몸에 배어, 노부부는 여전히 흙을 만진다. 이제는 해질녁이 되면 습관처럼 동네산책을 하며 그 풍경을 바라본다.


집 한쪽, 내년에 심으려고 저장 중인 마늘과 참깨



육남매 모두 시집장가를 가 손주들까지 가족이 배로 늘어났다. 배추심어 겨울 김장철이 되면 가족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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