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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차로 실어 나르는 빛나는 벽돌인생2018-04-03

지게차로 실어 나르는 빛나는 벽돌인생

지게차로 실어 나르는 빛나는 벽돌인생

삼례건재 김복숙

 
여자라서 못할 일 없는 것이다

그녀는 이 투박한 현장에서

삶으로 그것을 증명했다



편견은 다른 사람의 삶과 다른 방식의 생각을 접하지 않고서는 웬만해서는 스스로 없어지지 않는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벽돌이나 시멘트, 모래와 같은 건축재료를 취급하는 건재사를 드나들 일은 별로 없었다. 드나드는 것은 고사하고 도심 외곽에 널찍하게 자리하고 있는 이런 저런 건재사들의 삭막한 풍경을 눈여겨 본적도 거의 없다. 나의 편견 속에서 그곳은 남자들의 세계였다. 건설현장의 거칠고 단단한 남자들이 벽돌과 모래와 시멘트를 커다란 장비를 움직이며 사고파는 흙먼지 가득한 미지의 세상이었다. 굉음소리 요란한 지게차와 포크레인, 스키로더 같은 중장비를 능숙하게 조작하며 높게 쌓여 있는 회색벽돌 사이를 누비는 삼례건재의 김복숙씨(65)는 나의 편견을 없어지게 했고 그 없어진 만큼 새로운 세계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 한 달에 한 번 다른 사람들의 삶의 풍경을 엿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볼 수 없었을 새로운 풍경을 이번에도 다시 만난 것이다.


막둥이 아들 안고 벽돌 나르던 때

“32년 전에 삼례로 들어와 마천에 살았는데 엿을 만들어 팔았어. 지금도 노인양반들은 벽돌 파는 데라고 하면 못 알아듣고 엿장수네 집이라고 하면 금방 알아들어. 그때 내가 집에서 다 만들었어. 우리 딸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였는데 새벽에 깨워서 졸면서 엿을 만들었지. 근처 식당에서 식당일도 하고. 우리 아저씨도 밑천이 없으니까 벽돌이나 흙, 공사 자재들 배달을 시작한 거지. 그러다 우리 가게 낸 것은 20년 전이고.”


삽으로 흙을 퍼나르는 김복숙씨.


 

김복숙씨가 능숙하게 주문을 체크하고 있다.


김복숙씨는 순창이 고향이지만 사탕공장을 하던 전주의 외가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사탕 포장하는 일을 거들다가 사탕도매업을 하던 남편을 만났다. 청춘남녀의 열애였다. 전주 서학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남편과 함께 주류 유통업을 하며 살림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사업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삼례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단단한 손길로 벽들을 옮기고 있다. 무거운 벽돌도 그녀에겐 문제가 없다.


삼례 근처에 벽돌공장이 있었어. 거기서 벽돌 떼다가 배달을 많이 했지. 그때만 해도 벽돌장사가 잘 되던 때였어. 삼례 공장만으로는 물량이 딸리니까 김제까지 가서 벽돌 떼어오고 그랬지. 그때는 지게차가 없으니까 벽돌을 일일이 손으로 다 내렸어. 1시간 하면 3~4천장 금방 내려. 우리 아저씨랑 나랑 둘이서 호흡이 잘 맞아. 그때는 또 한창 나이니까 힘든 줄도 모르고 그렇게 일을 했지. 지금 하라고 하면 못해. 아유 참말로 징해. 갓난아이 데리고 다니면서 일했어. 막내아들을 낳고 일을 해야 하는데 맡길 데는 없으니까 트럭 가운데에 태우고 같이 배달 일을 다녔지. 지금도 그때 일이 생생해.”

 

반말하지 마세요. 아저씨

김복숙씨의 팔뚝은 굵다. 술 박스 나르고 벽돌을 나르느라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자기를 외형적이고 괄괄하다고 생각하지만 남편이 돈 벌어다 주면 애들 밥해주고 간식해서 먹이고 그렇게 숲 속 조용한 마을에서 살고 싶은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삼례에서 말띠 띠동갑들이 모임을 하는데 하나 같이 가만히 앉아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없다고 한다. 그렇게 말띠 여자들끼리 함께 모여서 서로의 바쁘고 고단한 삶을 격려해 가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궁금했다. 여자라서 못할 일은 없는 것이지만 어떻게 이 무겁고 투박한 장비들을 다루게 됐고 거칠고 무뚝뚝한 남자들 투성이인 이곳에서 삶을 꾸려갈 수 있는지 그 비결을 물어봤다.

 

지게차, 포크레인, 스키로더는 아저씨 하는 거 어깨 너머로 보면서 배웠어. 우리가게에서 파는 것들이 건축자재들이다보니까 아무래도 거친 아저씨들이 많이 오지. 그런데 나는 무서운 적이 별로 없어. 그냥 나한테 대하는 대로 똑같이 대하면 마음이 편하더라고. 말이 반토막짜리가 많아. 싸래기 토막을 반토막을 삶아 먹었나 그래 버리 던지, 반토막 대학 나오셨쎄요? 웃으면서 톡 싸버리지.”

 

내 인생은 순간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한참 건설경기가 좋았던 시절에는 벽돌장사가 제법 잘 됐다고 한다. 최근 들어서는 경기가 예전 같지 않아서 못자리 흙이나 딸기농사에 쓰는 마사토도 취급하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꾸준히 가게를 찾아주는 단골들이 있다. 단골손님 무섭다는 말이 있듯이 그들이 부르면 작은 트럭에 모래며 벽돌들을 싣고 장수, 진안, 김제까지도 달려간다. 70살 까지는 장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물론 70살이 넘어 가게를 정리하면 남편과 함께 여기 저기 놀러 다니며 살아야겠다는 소박한 꿈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았다.

 

장사를 하려면 남겨먹어야 하니까 어떤 때는 거짓말도 좀 섞어가면서 해야 하는데 나는 그런 걸 못해. 10원 받을 것을 20, 30원 받으려면 이상하잖아. 가슴이 두근두근 뛰어. 그러니까 돈은 많이 못 벌어도 믿고 사는 단골들이 많지. 우리 집 아저씨가 칠십까지는 장사해야 한디야. 나는 그만 하고 싶은데. 근데 생각해보면 난 이것이 체질에 맞나봐. 재미있어. 지금 생각해보면 살아온 것이 참 재미있었네. 저승 갈 때 물어본다잖아. 이승에서 뭐하고 왔냐고. 나는 벽돌만 나르다 왔다고 하게 생겼어. 그래도 바깥양반이랑 나랑 몸 아픈데 없고 자식들 시집보내고 좋은 직장 다니고, 돈 필요해서 어디 손 내밀지 않아도 되고. 이 정도면 잘 살았지 싶어. 돈이 많으면 좋을 게 하나도 없어. 싸움밖에 더 해. 그러니까 이렇게 살다가 칠십 넘어서는 여기저기 여행 다니면서 살면 좋겠네.”

 

<내 인생은 순간이라는 돌로 쌓은 성벽이다. 어느 순간은 노다지처럼 귀하고 어느 벽돌은 없는 것으로 하고 싶고 잊어버리고도 싶지만 엄연히 내 인생의 한 순간이다. 나는 안다. 내 성벽의 무수한 돌들 중에 몇 개는 황홀하게 빛나는 것임을. 또 안다. 모든 순간이 번쩍 거릴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겠다. 인생의 황홀한 어느 한 순간은 인생을 여는 열쇠구멍 같은 것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님을>.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소설가 성석제의 글이 떠올랐다. 그녀가 쌓아 올이고 실어 날랐던 수많은 벽돌들이 그녀의 인생이었음을. 그리고 생각했다. 그 수많은 벽돌들 중에서 그녀가 기억하는 반짝하고 빛나는 황금빛 벽돌들이 몇 개쯤은 섞여있다는 것을.


주문서가 붙은 복숙씨의 사무실 내부.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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