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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디어천국, 12평 복사집2018-02-05

나의 미디어천국, 12평 복사집

나의 미디어천국. 12평의 복사집

이서면 에코르2차 아파트 송승규 어르신

 

 

과학기술의 발달은 우리에게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 줬지만 그만큼의 것들을 사라지게도 했다. 그 중의 하나가 오래된 인쇄문화들이다. 지금은 컴퓨터의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인쇄가 되는 시대이지만 과거에는 수많은 인쇄의 공정이 있었고 그 공정들에 따르는 전문기술과 그만큼의 세분화된 직업들이 존재했었다. 옵셋인쇄, 필름인쇄, 마스터인쇄 등 서로 다른 인쇄의 방식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도 어렵지만, 송승규 어르신(72. 이서면 거주)이 설명해주신 활판인쇄 시절의 문선, 조판, 공타, 청타 등의 단어들은 컴퓨터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는 신비롭고 낯선 것들이었다.

 

전북일보에서 문선일을 시작했지. 지금처럼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하질 않았어. 그런 것도 없었으니까. 지면 사이즈를 보고 부분 편집을 하는 거지. 그럼 그 사이즈에 맞는 와꾸를 짜서 그 안에다가 글자를 뽑아서 넣는 거지. 문선은 글자판에서 글자 한 자 한 자를 뽑아서 조판하는 일인데 손이 한 번 가면 두 번은 안가. 하도 이 안에서만 생활을 하다보니까 입력이 돼서 글자들이 어디 있는지 다 알아. 내 주력은 공타였지 공타가 청타로 바뀌고 청타를 오래하다가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들어오면서 그 작업들은 다 없어졌어.”

 


활자를 뽑아 쓰던 손으로 카메라를 들다

송승규 어르신은 작년에 이서 혁신도시 주민들과 함께 진행한 주민시네마스쿨을 통해 만났다. 어르신은 지난 2012, 오랜 동안 이어오던 인쇄소를 정리하고 전주대학교 인근에서 12평짜리 작은 복사집을 운영하고 계신다. 그사이 방송통신대학에서 미디어영상을 공부하고 익산미디어센터에서 실버영상제작단 활동을 하면서 몇 편의 다큐와 단편영화도 만드셨다고 한다. 어르신에게는 본인이 해 오셨던 문선, 공타, 청타, 복사로 이어지는 인쇄공정의 작은 역사들이 결국 지금 하고 있는 미디어 활동과 맞닿아 있다고 말씀하셨다.

 

방송통신대는 집사람이 먼저 다니기 시작했지. 근데 거기에 미디어영상과가 있더라고. 왠지 친숙했어. 그래도 내 평생 직업이 미디어랑 연관 있다고 생각하니까. 칠십 지나서 지난 일을 생각해보면 내가 맞이해야 할 흐름이라고 생각해. 지금 생각해 보니 마치 각본 짜 놓은 것처럼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더라고. 디아이텍이라고 큰 인쇄소가 있어. 거기서 기다리면서 쌓여있는 전단지를 무심코 봤는데 그 많은 전단지 중에 하필이면 미디어센터에서 수강생 모집 전단지가 눈에 띄더라고. 실버 영상제작단 모집을 하더라고. 그래서 거기서 처음 영상을 시작했지.”


 



밥 먹듯이 밤샘하던 인쇄소 시절

어르신은 전주 인쇄골목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곳의 풍경과 그곳에서 보냈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들은 인쇄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기술과 공정으로만 이해될 수 없는 고유한 문화이고 생생한 미디어였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계문사 시절에 직원이 많이 있을 때는 열 명 있었어. 하루에 여덟 시간 근무하면서 많이 해야 A4용지 크기로 16. 열 명이 하루에 160장정도 밖에 못하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직장생활을 하긴 했지만 월급이 적었어. 근데 가다보니 저녁 12시까지 불 켜져 있는 곳이 인쇄소 골목이더라고. 떼돈 벌겠다 싶어서 일을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바쁘더라고. 도청, 시청 사업계획서, 지침서 문서작업부터 대학생들 석박사 논문 작업까지 일은 밀려 오지,일주일째 잠을 못 자던 때가 허다했지.”

 

인쇄골목의 인쇄소들은 대부분 영세업이었다. 가게 임대료가 싼 곳을 찾아 후미진 뒷골목을 찾다보니 자연스럽게 인쇄골목이 형성되었고 송승규 어르신은 그 곳에서 젊은 날을 보냈다. 한참 인쇄소를 운영하던 때, 옆 가게 인쇄소 사람들과 밥을 먹다가 지나가던 할머니에게 들은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고 한다.


복사집 앞에 선 송승규 어르신



할머니가 우리를 보면서 젊은 사람들이 무슨 애로사항이 그렇게 많아? 뭐하는 사람들이여? 그러시더라고. 그래서 인쇄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랬지. 그러니까 그 할머니가 아이고 점잖은 사람들이로구만 그러더라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나쁜 일만은 아니 것다는 생각을 했지. 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더라고. 영세업이라고 우습게 볼 것이 아니지. 할머니의 그 한 마디가 그때는 굉장히 감동스러웠어. 그야말로 문자를 다루는 직업에 내가 종사하고 있었던 거야.”

 


A4용지 두 박스 들 힘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

세상은 사람들이 미처 따라잡기 어려운 속도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어르신은 참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오셨던 것 같다. 스물아홉에 계문사라는 인쇄소를 시작으로 활판인쇄부터 시작한 어르신의 문자미디어 인생은 첨단 컴퓨터 복사기를 다루는 지금의 복사집으로 이어지고, “지금은 읽는 시대가 아니고 보는 시대라고 미디어의 변화와 흐름을 직관적으로 짚어내는 모습에서 적지 않은 연배에도 캠코더와 영상편집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12평의 천국 다큐 중 한 장면



다큐를 한 편 만들었지. 제목은 <12평의 천국>이라고 지었어. 이 복사집이 딱 12평이거든. 복사집 작업하는 것,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어렸을 때 어떻게 커왔고 결혼해서 아이들이 잘 커서 사회활동도 잘 하고 있고, 그래서 현재 내가 있는 이 곳 12평이 결국 천국이다, 이런 내용이야. 전주대학교에 영상학과가 있어서 그 친구들이 콘티나 시나리오 같은 거 제본하려고 가져와. 그럼 그 친구들한테 나도 이거 하나 다운받아도 되냐고 물어보고 보면서 공부하기도 하지. 말년에 참 좋아. A4용지 두 박스만 들 힘이 있으면 그때까지 이 복사집 할거야. 그 정도 들 힘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어.”


자신의 생애사 기록을 위해 오래된사진들을 정리해서 스캔받는 작업을 하고 있다.



어르신은 지금 어르신의 생애사를 영상으로 만드는 준비를 하고 계신다. 학교가 개학해서 바빠지기 전에 가족사진을 정리하고 그것을 한 장 한 장 스캔해서 파일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 과정이 한 번 손이 가면 두 번 손이 가지 않았다는 어르신의 왕년의 문선 공정처럼 익숙하고 빠른 손놀림은 아니겠지만 어르신이 그렇게 살아오셨던 것처럼 소박하지만 감동적인 생애사 영상이 차근차근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 어르신의 12평 복사집은 어르신의 미디어 천국이다.



/글·사진=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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