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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집 쥔장 내외의 한결같은 20년 밥심2017-08-07

밥집 쥔장 내외의 한결같은 20년 밥심

밥집 쥔장 내외의 한결같은 20년 밥심

화산 화평식당 김경희·정준모 부부

 


입추와 말복을 며칠 앞두고 있지만 올 여름은 이제 막 시작되는 느낌이다. 한 달 가까이 장마와 국지성 폭우로 시달리고 났더니 습기를 많이 머금은 폭염의 여름날이 시작됐다. 그동안의 여름에 대한 기억과 여름을 나는 각자의 노하우만으로는 이 지독한 여름을 쉽게 견뎌내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이럴 때일수록 잘 먹고 잘 자고 잘 쉬는 것이 상책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최상책은 잘 먹는 것이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로부터 밥심으로 산다고 했다. 꽃심, 진심, 충심, 단심 같은 근사한 표현은 아니지만 밥심이란 말은 밥을 주식으로 먹고사는 한국인들에게 다른 말로는 대신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내력과 큰 울림이 있다. 아열대의 수증기 가득한 여름날씨에 모두가 밥심으로 살아가고 또 모두가 누군가의 밥심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고샅에서 밥심 내력 가득한 화산 화평식당 김경희(63) 사장님을 만났다.


번거롭고 고된 일이지만 화평식당은 이십년 째 솥밥을 고수하고 있다. 



백반 육천원도 지금 십년 째 그대로야. 우리 아저씨가 공기밥 값 못 받게 해. 처음 장사할 때부터 공기밥 값은 따로 안 받았어. 일하고 온 사람들 밥 많이 먹는데 그 돈 못 받겠더라고. 야박하게 그 돈을 받아서 뭐 하냐, 우리 아저씨 철학이지. 우리는 솥단지에다가 냄비 밥해서 그때그때 해서 퍼줘. 그러니까 손님들이 밥맛이 좋아서 오는 거야. 냄비에다 밥을 하니까 누룽지가 막 쌓이네. 그래서 누룽지도 끓여서 상에 냈지.”


솥밥 불 조절을 하고 있는 정준모씨



메뉴판에 몇 가지 요리가 적혀 있지만, 백반 하나로 지금 이 자리에서 20년 가까이 식당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밥에 있었다. 시간과 비용을 아끼기 위해 전기밥솥에 밥을 하고 손님이 몰리는 시간에 미리 공기에 담아 데워둔 밥을 내오는 식당문화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방금 해낸 솥밥의 맛을 몰라볼 한국인이 몇이나 될까. 번거롭고 고된 일이지만 화평식당은 이십년 째 솥밥을 고수하고 있다. 반찬과 찌개 담당은 김경희 사장님, 솥밥 담당은 정준모 사장님의 일이다. 백반의 진정한 맛은 밥으로 결정된다는 철학도 있었지만 사장님 내외가 솥밥을 고수하는 이유는 결국 밥심으로 살아간다는 삶의 내력을 일찌감치 터득한 탓이 클 것이다.


반찬과 찌개는 언제나 경희씨의 담당.



시집와서 봤더니 시어머니가 백반장사를 하고 계셨어. 식당 이름이 고산집이었어. 고산집하면 유명했지. 우리 어머니 솜씨가 좋았어. 그 당시는 연탄불도 없이 아궁이 세 개에다가 음식을 했지. 불 때고 숯에다가 생선 굽고 김도 굽고. 시어머니 돌아가시고는 장사를 안했는데, 몇 년 있다가 함바집을 시작했어. 다달이 현금으로 결제가 되니까 참 재미있더라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밥 준비하고, 둘이서 그 많은 사람들 밥을 삼시세끼 다 먹였지.”

 

그렇게 시작된 함바집은 인부들의 일터를 따라 화산에서 정읍으로, 고창으로 이동했다. 사장님 내외의 부지런하고 성실한 밥과 찌개의 맛이 인부들에게 인이 박힌 것이다. 고생한 보람으로 제법 돈도 벌었지만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지금 이 자리를 전세로 얻어 식당을 냈다. 처음에는 손님이 들지 않아 고전했지만 가게 앞으로 도로가 뚫리고 다리공사가 진행되면서 공사장 인부들 덕에 호황을 누리가 시작했다.


화평식당에는 매번 열가지가 넘는 반찬에 찌개나 국이 나온다.



그때는 도로 뚫리듯이 사람들이 막 밀려오더라고. 많을 때는 칠팔십 명씩 와서 먹고 가는데. 삼시세끼를 여기 와서 먹고 갔어. 그러다보니까 소문이 나는 거야. 안 오던 사람들도 다 오고, 지나가다 주차된 차들이 많으니까 또 들어오고. 그 당시 그 도로 공사를 4년 동안 했었거든. 그때 장사로 돈 벌어서 이 집 사버렸지. 그때부터 이 근처 공사하는 인부들 여기 와서 밥 먹고 관공서직원들 와서 밥 먹지, 농협, 우체국 직원들, 학교도 그때는 급식이 없었으니까 선생님들 와서 밥 먹고. 그때는 손님이 하도 많아서 순번타서 밥 먹고 그랬어.”

 

김경희 사장님의 고향은 전주 진북동 숲정이 근처라고 한다. 친구 따라 대둔산 놀러갔다 남편정준모(64)씨를 만났고 삼년 동안 완행버스를 타고 전주와 화산을 오가며 연애한 끝에 결혼해서 화산에 살고 계신다. 소재지 인구도 줄고 새로운 큰 공사도 더 없어 예전처럼 손님들이 줄을 서서 밥을 먹진 않지만 여전히 화평식당엔 많은 밥 손님들이 찾아든다. 사시사철 먹을거리 넘쳐나는 세상이지만 밥 때 돼서 제대로 된 밥과 찌개 한 그릇으로 밥심을 채울 수 있는 식당은 흔하지 않다.


 



예전에 우리 집이 이 근처에서는 최초로 밥 배달을 했어. 여기 농사짓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농번기 때 밥 배달을 했지. 우리 아저씨가 여기서 원채 오래 살아가지고 어디라고 하면 다 알아. 누구네 밭 하면 다 찾아 가지. 어디 축사 옆에 누구네 논밭이 어디 있는지 다 알지. 그때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식당은 식당대로 배달은 배달대로. 진짜 눈코뜰 새 없이 바빴지. 그래서 농번기 때 양파심고 뽑을 때는 점심 장사 할라고 우리 딸래미, 사위, 조카까지 다 와서 일을 거들어야 했어. 한참 때는 점심 배달을 이백 상 넘게 나가고 그랬지. 여기 식당도 꽉 들어앉으면 백 명이 앉아서 먹고 순번타고 밖에서도 줄 서있고 그랬지.”

 

화평식당은 인부들과 사람들의 밥심이 되어주었고 인부들과 사람들은 화평식당이 살아 갈 수 있는 밥심이 되어주었다. 단순한 논리 같지만 밥심의 내력은 그 단순한 논리 속에 고단하고 긴 이야기를 품고 있다. 모두들 뜨거운 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 한 그릇의 힘으로 아열대의 무더운 여름날을 이겨내 보자. 어르신들이 대를 이어오며 가르쳐준 말처럼 한국 사람은 밥심으로 살아가는 것이므로.



김경희 정준모 부부



밥장사가 넘들이 배고플 때, 힘들 때, 그 입에 밥 한 그릇 들어가게 해주는 것이 큰 행복이다. 그것이 복이다 생각하고 지금껏 살았어. 식당일을 오랜 동안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하는 동안은 계속 그 마음으로 하고 싶어.”



/사진·글 장미경(장미경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자 고산미소시장에서 공동체가 만든 제품을 파는 편집매장 홍홍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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